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골짜기'…'55조원' 베팅 리스크 현실로

머니투데이 안정준 기자, 최경민 기자, 박미리 기자, 이세연 기자 2024.05.07 16:05
글자크기

[MT리포트]탈 캐즘 로드맵①

편집자주 전기차 시장의 '캐즘'(Chasm, 대중화 전 일시적 수요 둔화기) 진입이 현실화했다. 완성차 업계의 생산 감축 후폭풍이 배터리 기업의 실적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대중화 문턱에서 전기차 시장이 주저앉으면, 미래 먹거리로 여겨 온 배터리의 밸류체인이 붕괴한다. '죽음의 골짜기'에 직면한 배터리 업계의 현실을 들여다 본다.

LG엔솔, 삼성SDI, SK온 영업이익 추이/그래픽=이지혜LG엔솔, 삼성SDI, SK온 영업이익 추이/그래픽=이지혜


LG에너지솔루션(LG엔솔)과 삼성SDI, SK온 등 배터리 3사의 올해 1분기 합산 영업이익은 932억원이다. 지난해 보다 86% 급감했다. 배터리 뿐만이 아니다. 배터리 용량과 출력 등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소재 양극재 생산기업인 에코프로비엠, LG화학(첨단소재부문), 포스코퓨처엠의 합산 영업이익 역시 1866억원으로 같은 기간 45.5% 줄었다. 배터리 전자의 이동 통로 역할을 하는 동박 제조를 담당한 SKC의 이차전지 소재 사업은 399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전년대비 적자폭이 커졌다. 양극과 음극을 나눠주는 분리막 제조사 SK아이이테크놀로지도 674억원의 영업손실을 내며 적자전환했다.

이같은 배터리 밸류체인의 실적 악화 요인은 전기차 캐즘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전기차 구매 수요가 감소하면서 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 재고조정과 생산 조절에 나섰다. 전방 시장 사업환경 변화은 배터리 업계의 어닝쇼크로 이어졌다. 위기의 양상은 완성차와 다르다. 한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완성차 업계는 전기차 수요가 둔화해도 하이브리 자동차와 내연기관 자동차 등 포트폴리오가 있지만 배터리 밸류체인에 속한 기업들은 전기차 시장이 무너지면 대안이 없다"고 했다.



문제는 이제 막 시작된 캐즘 발 충격의 끝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3~4년 뒤를 예측하는 전문가가 있는 반면, 전기차 자체가 캐즘을 극복하지 못하고 내연기관차 만큼 대중화된 시장을 형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비관론도 존재한다. A 배터리 소재사 대표는 "누군가 그 시기를 '안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LG엔솔, 삼성SDI, SK온 투자 추이/그래픽=이지혜LG엔솔, 삼성SDI, SK온 투자 추이/그래픽=이지혜
캐즘 기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업계는 존립을 위협받는다. 배터리 관련 산업을 미래 먹거리로 삼겠다며 쏟아부은 투자 규모가 천문학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3년간 LG엔솔과 삼성SDI, SK온 등 배터리 3사가 설비와 연구개발 등에 집행한 자금만 45조원에 이른다. 양극재와 동박, 분리막 등 배터리 소재 투자까지 합하면 55조원에 육박한다. 전기차 시장의 지속적 성장에 대한 베팅이었지만 장기간 전기차가 팔리지 않으면 고스란히 재무 리스크가 된다. 적신호가 들어온 곳도 있다. SK이노베이션의 지난해 부채는 50조7592억원으로 3년 새 두배 이상 급증했다. 부진에 빠진 SK온 지원 때문이었다.



업계는 투자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SK온은 1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비우호적인 업황에 대응하고자 유럽과 중국의 설비 증설 시점을 탄력적으로 조정하겠다"고 했다. LG엔솔은 올해 작년과 유사한 10조원 수준의 설비투자를 계획했지만 이를 재검토하고 있다. 양극재 업계도 일제히 "배터리 제조사 투자속도에 맞출 것"이라는 입장이다. 수요 부진에 빠진 전기차 배터리 대신 에너지저장장치(ESS)용 배터리 시장으로 눈을 돌리기도 한다. LG엔솔은 미국에 첫 ESS 배터리 전용 공장을 착공했고, 삼성SDI는 ESS 배터리 전담 조직을 신설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한계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시간벌기용 대책일 뿐이라는 것이다. 전기차 수요가 되살아나지 못하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캐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기차의 태생적 문제로 남아있는 충전시간과 주행거리를 개선할 기술이 최대한 빨리 나와야 하고 차량 가격도 내연기관차 수준으로 낮아져야 한다"며 "결국 원가와 R&D, 공정을 모두 잡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