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증과 관종의 흥미진진 콜라보, ‘그녀가 죽었다’

머니투데이 정수진(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4.05.07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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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보배' 변요한-신혜선의 호연에 영리한 연출이 더해진 수작

사진=콘텐츠지오사진=콘텐츠지오


"전 제 일이 너무 좋아요.”

'갓생’ 사는 직장인의 말인가 싶지만, 아니다. 물론 이 남자, 구정태(변요한)는 한 시도 허투루 쓰지 않는 부지런한 삶을 살긴 한다. 고객들에게 친절한 공인중개사이자 ‘개미아빠’란 필명으로 온라인상에서 부동산 지식을 나누는 평판 좋은 블로거인 동시에, 고객이 맡긴 열쇠를 이용해 수시로 남의 집에 침입해 그들의 삶을 훔쳐보는 취미까지, 이토록 바쁠 수 없다.

구정태는 침입한 남의 집에서 가장 하찮은 물건을 훔쳐 자신의 공간에 전시해 둔다. 죄의식은 없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쁜 짓은 절대 안 하고, 그냥 보기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그는 한 사람을 특정해 관찰하지 않지만, 예외가 생긴다. SNS 인플루언서 한소라(신혜선). 우연히 편의점에서 목격한 한소라는 소시지를 먹으면서 SNS엔 비건 샐러드를 먹고 있다고 올리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구정태를 매료시킨다. 남의 삶을 훔쳐보는 남자에게 남의 관심으로 살아가는 여자라니, 이 얼마나 바람직한(?) 조합인가. 그렇게 구정태는 한소라의 SNS 계정부터 사는 곳, 방문하는 곳 등 모든 것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관찰 152일째, 구정태는 한소라의 집에서 살해당한 그녀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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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죽었다’의 중반까지 스토리는 미스터리 추적 스릴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어쩌다 범죄현장에 얽히며 범인으로 몰리는 주인공이 누명을 벗고자 고군분투한다는 내용. 진실이 밝혀지는 가운데 튀어나오는 반전도 반전이지만, 이 영화의 절대 강점은 비호감으로 무장한 발칙한 캐릭터에 있다. 남을 훔쳐보며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그를 자각하지 못하는 구정태란 인물은 도무지 관객의 공감과 연민을 사기 힘든 캐릭터다. 최소한의 감정이입도 힘들 수 있어 뵈는 이 요상한 캐릭터에 김세휘 감독은 초반부터 관객에게 말을 거는 방식의 내레이션을 부여했고, 여기에 변요한 특유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더해지며 친근한 듯 불쾌한, 불쾌하지만 호기심이 드는 인물로 완성되어 시선을 붙잡는다.



여자 주인공 한소라 역시 마찬가지. SNS에서 남에게 보여지는 모습을 꾸미는 것이야 누구에게나 있는 모습이라지만, 카페에서 남의 명품백을 들고 자기 것인 것처럼 사진 찍는 인물이 호감형일 순 없다. 게다가 구정태가 누명을 벗기 위해, 형사 오영주(이엘)가 한소라 실종사건의 이면을 밝히기 위해 파헤치면서 보이는 한소라의 진면목은 구정태 뺨치게 징글징글하다. 남들을 훔쳐보는 한편 남들의 평판에 무척이나 신경쓰는 구정태는 물론, 스스로 모든 삶을 거짓으로 채우면서도 “내가 제일 불쌍해”라며 비이성적인 자기 연민과 나르시시즘으로 일관하는 한소라의 모습에 현대인의 병폐가 모두 집약된 느낌이라 불쾌하면서도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독특한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긴장감과 속도감이 일품이다. 전반부는 구정태의 시선으로, 후반부는 한소라의 시선으로 극을 끌고 가면서 러닝타임 103분 대부분을 텐션이 떨어지지 않게 가져가는 김세휘 감독의 연출이 일품이다. 스릴러 자체로 보면 예측 가능한 부분이 있지만, 군더더기 없는 연출과 끊임없는 캐릭터들의 내레이션으로 속도감을 부여하며 관객에게 많은 생각할 시간을 부여하지 않아 라닝타임 대부분에서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SNS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꼬집으면서도 유머를 놓치지 않는 면도 영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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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작품을 통해 자신들의 이름을 탄탄히 쌓아온 변요한과 신혜선의 힘은 이 작품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찰과 집착을 내레이션으로 들려주는 구정태는 얼핏 미드 ‘너의 모든 것’(원제 YOU)의 조(펜 바드글리)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변요한의 구정태는 광기로 얼룩진 눈빛의 조와는 달리 우리 곁에 있을 것 같은 친절한 공인중개사의 평범한 얼굴을 강조하며 곱씹을수록 공포를 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결백’ ‘타겟’ 등에서 원톱 주연의 패기를 보여주었던 신혜선의 스펙트럼 넓은 연기도 영화의 독특함을 돕는다. 이번 작품으로 신혜선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장을 찍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엘이 맡은 형사 오영주의 롤은 다소 도식적이라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영화 말미 관객을 대신해 준엄한 질문을 맡은 중요한 역할임은 분명하다.

‘그녀가 죽었다’는 5월 15일 개봉한다. 근래 보기 드문 신인 감독의 영리한 데뷔작인 데다, 변요한과 신혜선이라는 믿고 보는 배우들의 호연이 겹쳐졌으니 극장으로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아마도) ‘범죄도시4’가 1000만을 달성하며 기세가 꺾일 것이라 여겨지는 날짜에 개봉하니 좋은 성적을 기대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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