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 진료도 '1분 컷'…"이제 교수님도 못 보나" 불안에 떠는 환자들

머니투데이 박정렬 기자 2024.03.26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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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전 10시쯤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로비는 의사·환자가 거의 없이 한산한 모습이었다./사진=박정렬 기자 25일 오전 10시쯤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로비는 의사·환자가 거의 없이 한산한 모습이었다./사진=박정렬 기자


26일 오전 10시쯤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1층 로비는 한산한 모습이었다. 평소에는 앉을 자리를 찾기 어렵던 입구 앞 의무기록·영상복사 창구는 대기 인원이 '0명'이었다. 사람들로 가득 차 빽빽했던 에스컬레이터도 걸어서 오르내릴 수 있을 만큼 여유로웠다. 신경과·암병원·암센터는 환자가 많았지만 소아청소년과·가정의학과 등은 거의 없어 진료과별 편차는 있었다.

병원에 따르면 전공의 집단 이탈 이후 환자 수가 차츰 감소해 지금은 이전보다 외래는 20%, 입원·수술은 40~50%가량 줄었다. 아토피피부염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았다는 30대 이모씨는 "4~6주 간격으로 병원에 오는데 체감상 전보다 환자가 50%는 줄어든 것 같다"며 "교수님이 좀 피로해 보였다. 약을 처방받고 진료실에서 나오기까지 1분도 채 안 걸렸다"고 말했다.



앞서 뇌출혈 치료를 받고 2차 소견을 들으러 이 병원을 처음 찾았다는 70대 강모씨는 "몇 달 전에 예약했는데 다행히 늦춰지지 않았다. 환자가 없어서 그런지 진료도 빠르게 끝났다"며 "의사가 없다고 해서 마음 졸였는데 다행이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5일 오전 서울성모병원 암병원의 모습. 수납 창구에 빈자리게 적지 않다./사진=박정렬 기자 25일 오전 서울성모병원 암병원의 모습. 수납 창구에 빈자리게 적지 않다./사진=박정렬 기자
하지만, 서울성모병원이 지금처럼 외래 진료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주요 의과대학 교수들의 '사직서 제출' 행렬에 이 병원도 동참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서울성모병원을 수련병원으로 둔 가톨릭대 의대 교수들은 이날 저녁 총회를 열고 사직서 제출 시점 등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이 병원의 한 교수는 "전공의가 떠나고 하루하루 힘에 부치고 숨이 턱턱 막힌다. 젊은 의사들은 정부의 일방적인 의대 증원 추진 정책에 반감도 크다"며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에서 사직서를 제출하자고 하면 나부터 바로 쓸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병원을 떠난 전공의에게 면허정지 등 본격적인 행정처분을 예고하면서 이에 반발한 전국 40개 의대 교수들의 '사직 릴레이'가 확산하고 있다. 지난 25일부터 하루 만에 1000명 안팎이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추정될 정도다.

특히, 서울성모병원을 비롯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빅5 병원'은 이미 사직서를 제출했거나, 제출 계획을 밝힌 상태다. 방재승 서울의대·서울대병원 비대위원장은 전날 비상총회 직후 브리핑을 열고 "총 1400여 명의 교수진 중 900여 명이 (자발적 사직에) 답했고 그중 절반 이상이 사직서를 제출하겠다는 답장을 줬다"고 밝혔다.

같은 날 서울아산병원을 수련병원으로 둔 울산대 의대 비대위는 교수 767명 중 433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발표했다. 세브란스병원과 연계된 연세대 의대, 고려대 안암·구로·안산병원을 수련병원으로 둔 고려대 의대 교수들도 단체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삼성서울병원을 수련병원으로 두고 있는 성균관대 의대 교수들은 오는 28일 사직서를 일괄 제출할 예정이다.


방재승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열린 비대위 비상총회를 마친 후 결과 브리핑을 하고 있다.  서울대 의대 교수들은 이날부터 자발적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했다./사진=(서울=뉴스1) 신웅수 기자방재승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열린 비대위 비상총회를 마친 후 결과 브리핑을 하고 있다. 서울대 의대 교수들은 이날부터 자발적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했다./사진=(서울=뉴스1) 신웅수 기자
비수도권도 예외는 아니다. 순천향대 천안병원의 경우 이 병원의 순천향대 의대 교수 93명이 교수협의회에 사직서를 냈다. 충북대 의대는 전체 교수의 4분의 1인 50여 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광주지역 상급종합병원인 전남대·조선대 의대 비대위도 각각 20명 안팎이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대 의대는 전체 550여 명의 교수 중 100명가량이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파악된다. 사직서 제출 규모를 공개하지 않은 대학이 아직 많은데다 추가적으로 사직서 제출 여부·시기 등을 논의 중인 곳이 많아 숫자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전공의에 이어 교수들마저 병원을 떠난다는 소식에 암 등 중증 환자와 보호자들은 우려가 팽배하다. 서울성모병원에서 3주 간격으로 폐암 환자인 아버지의 면역항암제(키트루다) 주사 치료를 이어간다는 이모(39)씨는 "폐암은 워낙 빨리 퍼져 치료도 '속도전'이란 얘길 많이 한다"며 "언제든지 상태가 악화할 수 있는데 그때 치료받을 의사가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 밤에 잠도 오지 않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폐암 환자가 많이 찾는 한 카페에는 "흉부외과 진료가 저를 포함해 모두 1분 정도 만에 끝났다. 정상적인 진료가 이뤄지지 않는다"라거나 "75세 폐암 2기 아버지가 4달 뒤 수술이 잡혔는데 기다려도 괜찮을까요"처럼 환자·보호자의 걱정이 담긴 사연이 날마다 올라오고 있다.

병원에 남은 간호사·의료기사·행정직 등 구성원들도 예상치 못한 고용 불안에 떨고 있다. 의료수익이 적게는 수억 원에서 많게는 수 십억원까지 감소하면서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을 비롯해 수많은 병원이 '비상 경영'에 돌입했다. 무급휴가·무급휴직 사용을 강제하거나 연차휴가 사용 종용, 타 부서로의 일방적인 전환, 근무복 지급 중단 등의 경비 절감 조치가 시행되고 있다. 이대로라면 병원 휴업이나 운영 중단, 임금 체불 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보건의료노조는 "전공의들의 진료 거부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수술·입원·검사 취소와 연기, 응급실 진료 차질과 중증 환자 입원 거부 등 환자들이 생명이 위협받는다. 병원 운영 중단과 임금 체불에 대한 불안도 커지는 상황"이라며 "국립대병원·사립대병원·공공병원·민간종합병원 등 수련병원들의 파행 운영 상태를 방치한다면 대한민국의 의료와 의료인력 운영체계가 붕괴할 것"이라고 정부·의료계·정치권에 해결책 마련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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