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경제의 교차로…韓 배터리 산업의 '고차방정식'

머니투데이 권다희 기자 2023.06.19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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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전쟁1 공급망 재편의 위기와 기회] ② 배터리 산업 흔드는 지정학 변수

편집자주 '한국 배터리 산업은 10년 후에도 지금과 같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지정학적 요인이 배터리 산업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른 가운데 머니투데이가 해외공급망 취재와 독일 완성차 기업, 영국의 시장 분석가 등 외부에서 한국 배터리 산업을 보는 시각 등을 전달하고 한국 배터리 산업이 직면한 기회와 위기 요인을 살펴 봅니다.

한중일 3국이 배터리 산업 밸류체인 다운스트림을 장악한 현재의 시장 구조는 미국 IRA(인플레이션감축법)가 대표하는 지정학적 변수들에 의해 흔들리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핵심 산업 공급망을 역내 안에 구축하는 데 본격적으로 나서면서다. 자국 산업을 일으키는 동시에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가 중첩된 이 움직임은 한국의 배터리 산업에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정치와 경제의 교차로…韓 배터리 산업의 '고차방정식'


게임체인저 IRA…위기이자 기회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집권 직후인 2021년 초 배터리를 반도체, 핵심광물, 의약품과 함께 공급망 분석이 필요한 4대 핵심 품목으로 분류했다. 분석의 결론은 지난해 8월 발효된 IRA 등의 법안들로 구체화됐다. 미국이 IRA를 만든 의중은 미 안보 수장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지난해 남긴 말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지난해 9월 한 행사에서 2030년까지 미국이 주력할 3대 기술로 컴퓨팅, 바이오와 함께 청정에너지를 꼽으며 "청정에너지로의 세계적 전환은 지구의 건강을 위해 필요할 뿐 아니라 향후 몇 년 동안 경제와 일자리 증가의 주요 원천이 될 것"이라 했다. 청정에너지 생태계의 핵심인 전기차 및 에너지 저장시스템에 배터리가 필수라는 점은 미국이 IRA를 통해 배터리 산업에 정부 지원을 쏟는 이유를 가늠케 한다.



다른 한편으론 중국의 기술 굴기 견제라는 목적이 있다. IRA가 겨냥한 재생에너지·배터리 산업은 중국이 수직계열화를 달성한 분야다.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후 역내 공급망 구축 필요성을 절감한 유럽연합(EU)도 유사한 이유로 역외 배터리 광물 수입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CRMA (핵심원자재법)를 지난 3월 발표했다. 중국이 2015년 '중국제조2025'로 '반도체 굴기'를 천명한 뒤 반도체 산업에서 고조된 대중 견제만큼 강도가 세진 않지만 배터리 역시 세계 경제 '분절화(fragmentation)'를 대표하는 산업이 됐다.

배터리 산업이 지정학적 변수의 영향을 깊숙이 받게 되면서 한국 기업들의 셈법도 복잡해졌다. 배터리 공급망은 리튬·니켈 등의 광물 채굴, 광물의 제련과 가공, 양극재·음극재 등 배터리 핵심소재 생산, 핵심소재를 결합한 배터리 셀·모듈·팩 제조까지 광범위한 공급망을 갖고 있다. 광물 채굴부터 최종 제조까지 오는 과정에 전세계 거의 모든 대륙이 얽혀 있어 분절화가 쉽지 않다. 주요국 정치권의 이해관계와 비용 효율성을 원하는 시장간 긴장이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 포드가 중국 배터리 기업 CATL과 '기술협약' 형태로 미국 내에 배터리 공장을 짓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한편으로 전기차 배터리 시장 세계 8위 기업인 중국 궈쉬안가오커(Gotion High-Tech)가 추진 중인 미시간주 배터리 소재 공장 건설을 미 연방정부가 막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은 한국 기업들이 직면한 지정학적 리스크를 보여준다. '독일 폭스바겐이 지분 26%를 가진 중국 배터리 기업이 미국에 짓는 공장'에 대한 IRA 지원을 미 정부가 허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얽혀 있는 공급망 현실과 지정학적 요인이 시장에 드리우는 불확실성을 드러낸다. 미국 정부가 '자국이익'이라는 우선순위를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시장의 규칙이 달라질 수 있는 상황 자체가 기업에게는 리스크인 셈이다.

이런 상황은 한국 기업들에게 기회이자 위기다. 미국과 EU가 배터리 산업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방향의 정책을 펴고 있고,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 기업들의 경쟁사인 한국 기업들이 이 움직임의 수혜를 볼 수 있다는 점은 기회 요인으로 여겨진다. 전기차에 들어가는 배터리 광물의 40% 이상을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에서 조달해야 보조금을 지급하도록 한 IRA 규정 역시 FTA 체결국인 한국에게는 긍정적이다. 오랜 기간 제조업을 '아웃소싱' 해 왔던 북미·유럽 기업들이 제조업 역량과 안정된 제도를 보유한 국가 중 현실적으로 당장 협력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국가가 한국이기도 하다. 프랭크 데 로지에 캐나다 천연자원부 전략 정책 혁신 부문 차관보는 머니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과 같은 어려운 지정학적 상황에서는 동맹국과의 협력이 투자 결정의 핵심 동인"이라며 "(배터리 산업에서) 한국과의 협력은 매우 긍정적 요소"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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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은 중국 의존도 낮추기

그러나 중국을 공급망에서 배제하려는 미국과 유럽의 움직임은 그간 배터리 광물 제련 등을 중국에 의존해 왔던 한국 기업들에게 부담이기도 하다.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이차전지 핵심광물 8대 품목 공급망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8대 핵심 광물의 대중 의존도(수입액 기준)는 58.7%로 일본(41%), 독일(14.6%) 보다 높다. 배터리 산업의 성장기 동안 대중 의존도가 커진 결과(2010년 35.6%→ 2020년 58.7%)다. 공급망 재편에는 추가적인 비용과 위험이 뒤따른다. 경쟁력을 잃지 않으면서 '과제'를 달성해야 한다.

광물 제련 업의 특성상 중국 외 대체 국가를 단기간 내 찾기도 어렵다. 리튬·니켈·코발트 등 광석을 채취해서 이 광석을 배터리에 쓸 수 있는 물질로 제련하는 공정의 거의 대부분은 현재 중국이 장악하고 있다. 톈치리튬, 간펑리튬 등의 양대 리튬 제련 기업을 포함한 중국 기업들이 호주, 칠레 등의 주요 광산업체 지분을 사들여 광물 원석을 확보한 뒤 이를 제련하는 시설을 수년 전부터 구축해 온 데 따른 결과다. 글로벌 광업·금속 컨설팅 업체 CRU 그룹에 따르면 망간의 95%가 중국에서 정제되고 코발트(73%), 흑연(70%), 리튬(67%), 니켈(63%) 등 리튬이온 배터리 소재 재료를 만드는 과정의 대부분이 중국 기업에 의해 이뤄진다.



금속 제련은 공정에서 나오는 오염물질 때문에 환경규제가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북미나 유럽 등에는 생산시설을 짓기가 어렵다. 미국과 유럽 기업들의 제조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도 중국의 대안을 단기간 내 찾기 어려운 요인이다. 금속 제련은 기술 측면에서 어려운 건 아니나, 실제로 시장에서 요구하는 수량과 품질로 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건 시행착오로 완성되는 '경험의 영역'에 가깝다고 한다. S&P글로벌에서 리튬 및 배터리 금속을 담당하는 루카스 베드나르스키 수석 애널리스트는 "리튬 정제소가 완공 된 후 생산 측면에서 최대 용량을 얻는 데 약 2년이 걸린다"며 "생산시설의 교정에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했다.

중국 의존도 축소라는 공급망 재편을 달성한다고 해도 또 다른 도전이 있다. 미국과 EU 정부가 자국 배터리 공급망 육성 정책을 강화하고 있는 만큼, 아시아 국가들에 집중돼 있는 배터리 제조 시장이 지금 보다는 다극화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북유럽, 캐나다와 IRA로 재생에너지를 급격히 늘리고 있는 미국은 저렴한 청정 전력을 기반으로 '저탄소 공정'을 자국 배터리 산업의 경쟁 우위 요소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 전고체 등 차세대 이차전지 기술에 미국이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중국 배터리 기업들의 기술 개발 추격이 빨라지고 있다. 베드나르스키는 한국 배터리 업체들이 경쟁력을 유지하는데 가장 도전이 될 수 있는 요인으로 중국 기업들의 기술력 제고를 꼽았다. 그는 "중국이 R&D에 점점 더 중점을 두고 더 혁신적이 되고 있다"며 "힘든 경쟁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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