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은 하늘에서 무슨 얘기를 할까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2023.05.08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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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희의 思見]화담(和談) 고 구본무 회장 5주기를 맞아

/사진=LG 그룹 사이트 캡쳐/사진=LG 그룹 사이트 캡쳐


'화평하게 얘기를 나눈다(和談: 화담)'는 뜻의 아호(雅號)를 지닌 구본무 전 LG 회장을 떠나 보낸지도 2주 후면 만 5년이다. 그의 호를 딴 화담숲의 5월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그 비탈 봄볕에 땀흘리며 밀집 모자를 쓰고 정전작업을 하는 소탈한 시골 아저씨의 모습으로 금방이라도 그가 나올 듯한 그런 5월이다. 화담은 어디를 다녀도 늘 단출했다. 장자로서 집안 일이나 가업을 이끌어나갈 때는 늘 앞에 나서 있었지만 개인일정엔 격식을 싫어해 늘 혼자 다녔다.



방북 수행단으로 북한을 다녀왔을 때나 해외출장을 다녀온 후 김포공항이나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도 수많은 임직원들이 뒤따르는 다른 기업 총수들과 달리 그는 늘 혼자 바쁜 걸음으로 대기하고 있는 차를 향해 걸었다.

기자가 생전 구 회장을 마지막으로 본 곳에서도 그랬다. 2017년 10월 21일 이수영 OCI 그룹 회장이 타계한 날이다. 구 회장은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 혼자 들른 후 그 특유의 빠른 걸음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날 구 회장은 카우보이 모자와 같이 챙이 넓은 모자에 선글래스 차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 해 4월 구 회장은 뇌종양 수술을 받아 머리의 흉터자국을 숨기기 위해 화담 숲에 나무가지를 치면서 썼을 법한 그런 모자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 2개월 후인 12월 그는 두번째 뇌종양 수술을 받았고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졌다. 이수영 회장을 떠나보낸지 딱 7개월만에 그는 그렇게 조용히 자신이 가꿔놓은 화담숲으로 떠났고 5년이 흘렀다.

구 회장은 유독 장자로서의 무거운 무게를 지며 살았다.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삼촌이나 아제(5촌, 7촌)들과 동생들을 아우르며 겸손을 몸에 달고 살았다. 행사를 다닐 때는 수행비서 1명 외에는 경호원이든 홍보실 직원이든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그는 또 자신이 물려받은 LG 그룹의 자산이 올곧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 어떨 때는 지나치게 가족들에게도 엄할 때도 있었다.

일례로 4형제의 장남인 구 회장이 어느 토요일에 화담숲 옆에 위치한 곤지암 컨트리클럽(CC)에서 4형제의 아내들이 함께 골프 라운딩을 하는 것을 보고 이들에게 주말 골프장 출입금지령을 내린 적이 있다고 한다.

이유는 곤지암 CC가 주말과 휴일의 경우 회사 임직원들이 고객사들과 비즈니스를 하는 곳으로 붐비는데 평일이 아닌 주말에 집안 가족들이 이곳을 차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골프장이 한가한 평일엔 상관 없지만 주말엔 안된다고 가족들에게 선을 그었다.

/사진=LG 화담숲 전경, 화담숲 사이트 캡쳐/사진=LG 화담숲 전경, 화담숲 사이트 캡쳐
지나치게 보수적인 가풍이라고 비판받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구 회장이 장자로서 가업을 물려받아 이끌어온 스타일이다.

형제가 많은 구씨 집안과 동업자 허씨 집안까지 합치면 8촌 이내에도 수백명에 이르는 친인척이 있고, 이들을 조화롭게 이끌어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속에서 분란을 없애기 위해 선대부터 가족의 공동재산 성격의 경영권 지분을 장자에게 맡겨온 게 지금의 LG 그룹이다.

구본무 회장은 선대 구자경 명예회장으로부터, 구 명예회장은 선대 구인회 창업 회장으로부터 다른 가족들의 양해 하에 물려받은 경영재산을 이제는 장손인 구광모 회장에게 물려준 것이다. 이 지분은 LG 기업가문에서는 '버릴 수도 팔 수 없는' 종자다. 1년에 여덟번 이상의 집안 제사는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있을 더 많은 LG 장자로서 짊어지고 가야할 일들을 위한 기반이다.

LG의 중심을 지켰던 구본무 회장이 타계하면서 그가 생존했을 때는 없었던 여러 감정들이 가족들 사이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제도로서 묶어둔 가족이라는 이름이 '중심'을 잃으면서 옅어지는 모습이다. 그 결과는 뻔하다.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게 된다.

사실 19살의 외동 아들을 먼저 가슴에 묻어야 했던 김영식 여사나, 18살에 생모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던 구광모 회장이나 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생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뭉쳐 풀어야 할 숙제를 안았다.

서로 보듬으면서 살아가달라는 게 하늘에서 아내와 아들을 내려다보는 화담의 바람일 것이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는 공수래공수거다. 고 구본무 회장도 화담숲 한켠에 작은 누울 자리 하나 마련하고 떠났다. 5주기 추도식에서 화담의 뜻처럼 화평하게 이야기 나누는 LG 가족들이 되길 기대한다.

/사진=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사진=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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