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강의 죽음', 클리셰 넘쳐도 쫄깃한 고전 추리 여행

머니투데이 정수진(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2.02.0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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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강의 죽음', 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나일강의 죽음', 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범인은 당신들 중에 있습니다.”

수많은 추리물에서 명탐정들이 외쳤던 말이다. ‘나일 강의 죽음’에서도 공간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내부인에 의해 살인이 일어나는 클로즈드 서클(Closed circle)에서 탐정 에르큘 포와로가 저 말을 외친다. 2022년에 법의학자나 프로파일러, 하다못해 액션 히어로도 아닌 탐정이라니 무척 고색창연하다 싶지만 그 주인공이 ‘추리의 여왕’이라 불리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창조한 에르큘 포와로라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탐정을 꼽으라면 아서 코난 도일이 만든 셜록 홈스가 첫손에 꼽히겠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추리소설가를 꼽으라면 단연 애거서 크리스티다. 성경과 셰익스피어의 희곡 다음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소설 판매량을 보인 애거서 크리스티는 에르큘 포와로와 미스 마플을 탄생시키며 후대 추리물에서 장르를 정립하고 클리셰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클로즈드 서클의 상황에서 추리를 마친 탐정이 용의자들을 불러 모아 진상을 밝히는 모습은 이른바 ‘포와로 피날레’라고 하여 추리물의 전형적인 클리셰로 자리잡은 장면. 만화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명탐정 코난’에서 주인공이 매 사건마다 외치는 시그니처 대사 “범인은 이 안에 있어!”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르큘 포와로에게 빚을 졌다고 보면 된다.



영화는 에르큘 포와로가 어떻게 명탐정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왜 콧수염에 집착하는지 보여주는 프롤로그를 지나 1937년, 어느 화려한 클럽에서 관능적인 춤을 추던 재클린(에마 매키)과 약혼자 사이먼(아미 해머)이 재클린의 부유한 친구인 상속녀 리넷(갤 가돗)을 만나는 장면으로 바뀐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세계 최고의 탐정 에르큘 포와로(케네스 브래너)는 얼마 후 이집트의 화려한 호텔 결혼식에서 이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단 신혼부부의 주인공은 재클린과 사이먼이 아니라 리넷과 사이먼. 그 경악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재클린은 신혼여행 내내 부부를 스토킹하며 음산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나일강의 죽음', 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나일강의 죽음', 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치정은 언제나 사건의 원인이 되는 법인데, 게다가 리넷은 세상이 알아주는 부유한 상속녀. 리넷과 사이먼의 ‘잘못된 만남’으로 상처받은 사람이 생겼고, 이는 재클린뿐이 아니다. 리넷이 원래 결혼할 뻔 했던 닥터 윈들셤(러셀 브랜드)의 마음도 편치 않고, 리넷의 사촌이자 재산관리인인 앤드류(알리 파잘)나 대녀인 리넷의 재력을 경멸하는 대모 마리(제니퍼 손더스), 리넷의 재력을 부러워하며 순간순간 음험한 눈빛을 발하는 마리의 간호사 바워스(돈 프렌치)와 리넷의 비서 루이즈(로즈 레슬리) 등 누구 하나 리넷과 사이먼 부부에게 온전한 애정을 갖고 있는 인물을 찾기 힘들다. 재클린의 스토킹을 피해 부부는 초호화 여객선 ‘카르낙 호’를 아부심벨까지 전세 내고, 리넷 또한 남 몰래 포와로에게 “돈이 많으면 진정한 친구가 없죠. 믿을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라며 자신의 신변에 대해 우려하고 조심했으나 결국 사건은 벌어지고야 만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생전에 가장 아끼고 사랑했다고 전해지는 ‘나일 강의 죽음’은 작가의 경험담을 모티프로 하여 실제 이집트를 여행할 때 집필하여 생생함을 더한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 이어 다시 한번 크리스티의 소설을 스크린으로 불러낸 주연 겸 감독인 케네스 브래너는 대륙을 횡단하던 열차의 1등석에서 나일 강을 유유히 떠다니는 유람선으로 무대를 바꾸고 한층 화려한 비주얼을 부각시켰다. 전 세계에 4대뿐이라는 65mm 카메라로 담아낸 이집트 나일 강의 전경은 마음대로 여행하기 힘든 팬데믹 시대의 관객들을 황홀하게 유혹하고, 크리스티가 소설을 집필했던 카타락트 호텔을 재현한 호텔 세트부터 실제 신전과 같은 높이와 너비로 지어진 거대한 아부심벨, 225톤에 달하는 초호화 여객선 세트 등 거대하고 웅장한 스케일의 프로덕션이 두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 내내 호화로움을 자아낸다. ‘레미제라블’ ‘대니쉬 걸’ ‘캣츠’ 등에서 활약한 디자이너 파코 델가도의 의상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페넬로페 크루즈, 윌렘 대포, 주디 덴치, 조니 뎁, 미셸 파이퍼, 올리비아 콜맨 등 쟁쟁한 출연진으로 눈길을 모은 ‘오리엔트 특급 살인’처럼 ‘나일 강의 죽음’ 출연진의 면면도 화려하다. ‘원더우먼’의 갤 가돗을 비롯해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로 얼굴을 알린 에마 매키, ‘블랙 팬서’의 레티티아 라이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아미 해머, ‘왕좌의 게임’ 시리즈로 유명한 로즈 레슬리, 그리고 아네트 베닝까지!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 건 우아한 상속녀 갤 가돗이지만 끝까지 강렬함을 놓지 않는 건 재클린 역의 에마 매키일 듯 싶다. 이 외에 포와로를 도와 영화의 해설 역할을 맡는 부크 역의 톰 베이트먼은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본 이들에게 반가움을 더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물에서 역사가 스포일러이듯 ‘나일 강의 죽음’은 이미 1937년 발표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원작이 스포일러다. 그러나 원작을 읽지 않았다고 해도 추리물로 이 영화를 접한다면 아쉬움은 짙을 수밖에 없다. 수십 년의 세월을 겪으며 관객들이 고전 추리물의 플롯에 익숙해져 있는 데다, ‘회색 뇌세포’를 작동시켜 추리를 해나가는 포와로의 특징 때문인지 영화 속 추리 과정 또한 관객과의 ‘밀당’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다. 아름다운 영상미와 고풍스러운 미장센, 그 위를 수놓은 극적인 치정극으로 눈과 귀는 적당히 즐거우니까. 영화를 본 뒤 간만에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애거서 크리스티의 원작을 읽거나 티빙에 업로드된 ‘명탐정 포와로’ 시리즈를 보는 것도 ‘나일 강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즐기는 방법이 될 것이다.

‘나일 강의 죽음’은 2월 9일 개봉한다.

정수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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