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서명한 자문안, 참고만 할건가…과학기술은 긴 호흡으로"

머니투데이 변휘 기자 2021.11.04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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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기자문회의 30년 기념 지상좌담]역대 정부 부의장들의 고언

(왼쪽부터) 김우식·김도연·신성철·염한웅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전·현직 부의장.(왼쪽부터) 김우식·김도연·신성철·염한웅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전·현직 부의장.


#. 1980년대 들어 과학기술이 세계 흐름을 주도하면서 우리나라도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어나갈 범국가적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사회적으로 대두됐다. 특히 과학기술 분야는 지극히 전문성이 요구되는 동시에 범국가적인 자원 투입이 이뤄지는 만큼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자문을 수행하는 전문기구의 필요성이 요구됐다. 1991년 5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과기자문회의)가 상설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로 출범한 배경이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청사진을 제시해 온 과기자문회의가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했다. 이를 기념해 오는 8일 '과학으로 그리는 미래, 디딤돌을 놓다'라는 슬로건으로 기념 컨퍼런스를 앞두고 있다. 강건기 과기자문회의 지원단장은 "서른살 청년기에 접어든 자문회의가 일궈낸 성과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발전방향에 대해 논의하는 소통의 장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에 앞서 머니투데이는 역대 부의장에게 과기자문회의의 지난 30년 발자취를 바탕으로 성과와 한계, 또 앞으로 30년의 정책 제언을 듣는 지상 좌담회를 마련했다. 좌담회는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의 전·현직 부의장에 대한 개별 대면 또는 서면 인터뷰로 진행했다.

[참석자](역임 시기 순)



△김우식 창의공학연구원 이사장(전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 2005. 10 ~ 2006. 10 과기자문회의 부의장 역임)
△김도연 울산공업학원 이사장(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2009.12 ~ 2010.11 과기자문회의 부의장 역임)
△신성철 전 KAIST 총장(전 DGIST 총장, 2015.11~2016.11 과기자문회의 부의장 역임)
△염한웅 포항공대 교수(2017.12~현재 과기자문회의 부의장)

김우식 창의공학연구원 이사장./사진제공=뉴스1김우식 창의공학연구원 이사장./사진제공=뉴스1
-과기자문회의의 30년 역사에 대한 평가를 부탁드린다

▶김우식 이사장=국정운영 과정에서 각 분야 전문가들의 자문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나 자문이라는 것은 듣는 사람의 자세가 중요하다. 진지하게 들어줘야 하는데,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는 과학기술 분야의 자문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셨고, 과기자문회의의 역할을 중요하게 평가하셨다. 더욱이 노 대통령께선 과학기술 쪽은 관계 부처와 전문가들에게 일임하셨고, 설사 국정 방향과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과기자문회의에서 어떤 말이든 편하게 얘기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런 측면에서 과거보다 한층 자유로운 소통이 이뤄졌다.


▶김도연 이사장 = 대한민국의 지난 30년은 과학기술의 측면에서 선진국들과 본격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선 대도약의 시기였다. 반도체 등 새로운 산업이 주력으로 자리 잡았고 정보통신 기술에 힘입은 인터넷 기업들이 약진했다. 자동차와 조선 등의 전통산업도 기술력에 힘입어 세계시장을 누볐다. 기초과학도 세계의 변화에 앞장서게 되었다. 과기자문회의도 이러한 도약에 당연히 작은 힘이나마 일조한 것으로 평가한다.

▶신성철 전 총장=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의 국가적 진흥이 시작된 게 1960년대부터다. '30년'을 한 세대로 본다면, 1990년대까지는 선진국을 따라하는 '모방기', 지금까지의 30년은 '성장기'였다. 그리고 앞으로 30년은 '번영기'가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과기자문회의는 전문가 집단으로서 한국 과학기술의 중장기 전략을 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역사에서 과기자문회의가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은 어떠한가

▶김도연 이사장 = 지난날에는 문자 그대로 '자문' 회의였다. 정책 집행기관이 아니기에 직접적인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만 미래 지향적 관점에서 정책방향을 도출하거나 혹은 중장기적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에는 성실했던 것으로 믿는다. 특히 과학기술 정책 관련 정부와 국민사이의 소통에 기여했다.

▶신성철 전 총장 = 국가의 과학기술 분야 싱크탱크로서 국가적 과제를 시의 적절하게 설정하고, 중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는데 탁월했다.

▶염한웅 교수=대통령이 직접 사인해 자문안을 의결한다. 이는 단순히 '자문을 청취했다'는 게 아니라, 대통령이 직접 '이런 방향으로 실행하자'고 결정했다는 의미다. 정책을 실행하는 부처에서도 자문안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의견과 실행계획을 만들어야 하고, 이행 상황을 주기적으로 점검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

김도연 울산공업학원 이사장./사진제공=울산공업학원김도연 울산공업학원 이사장./사진제공=울산공업학원
-부의장 재임 시기의 성과를 꼽아주신다면.

▶김우식 이사장 = 과기자문회의 성과를 정량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부의장 재임 당시 각 분과별 의제를 대통령께 모아서 보고했는데, 당시 과학기술 관련 관계 부처의 입장을 종합해 '과학기술의 특성화, 대중화, 세계화', 이 세 가지를 표제로 내걸고 추진했다. 이를 '대통령께서도 신경을 써달라'고 요청했고, 수용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김도연 이사장 = 통상 과학기술을 뭉뚱그려 이야기하지만 과학과 기술은 완연히 다르다. 과학은 국가의 '격(格)'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기술은 국가의 '부(富)'를 쌓는 역할임을 강조해, 과학기술 분야의 국정을 수행하는 분들이 그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도록 노력했다.

▶신성철 전 총장=이미 6~7년 전에 과기자문회의는 바이오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해 관련 산업의 생태계 확충 방안을 마련했고, 탄소 중립을 위한 과학계의 청사진을 대통령에 보고했다. 현 정부의 바이오 진흥, 탄소 중립 노력의 기틀이 이미 이전 정부에서 마련된 셈이다. 또 수학적 혁신을 위한 창조 사회 구현, 민·군 협업을 통한 국방 R&D(연구·개발) 선진화, 과학기술의 '퍼스트 무버'로 도약하기 위해 이학(물리학·화학·천문학·생물학·지질학 등 자연과학의 통칭) 혁신, 화학물질과 미세먼지 등 유해환경 피해 예방 부분도 연구 과제로 채택했다.

▶염한웅 교수 = 과기자문회의와 심의회의를 통합해 과학기술 방향성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정책 심의와 연계했다. 또 젊은 연구자들을 자문회의에 모셨다. 판단의 깊이는 한계가 있을지 몰라도 연구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된 건 긍정적이다. 또 과거에는 과기자문회의가 독자적 철학으로 운영되기보다는 청와대의 의지가 투영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제가 지속해서 부의장직을 맡으면서 일관된 방향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염 부의장은 현 정부 초대 과기자문회의 부의장으로 위촉된 후 최초의 3연임을 기록했다.)

-과기자문회의 활동의 한계와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

▶김우식 이사장 = 자문기구라는 것 자체가 한계일 수 있다.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도움을 주는 것까지가 역할이지, 행정적으로 부처에 지시할 수는 없어서다. 다만 그만큼 어떤 과학기술 관계부처보다도 자유로운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또 전문가들은 다양한 요구를 하는데, 물리적 제약 때문에 부응하는데 모자란 점도 있었을 것이다.

▶김도연 이사장 = 과기자문회의는 짧은 기간 봉사하는 비상근 위원들의 모임인 탓에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단어 그대로 자문 업무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업무과제를 과기자문회의 스스로 발굴하는 것도 좋지만, 정부가 구체적 과제에 대해 자문을 요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성철 전 총장 = 과기자문회의가 아이디어를 제안하면 산업 또는 과학기술 관련 부처에서 집행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괴리가 있다. 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할 때는 마치 바로 시행할 것처럼 반응한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은 만날 기회를 갖기 어려웠기 때문에, 대통령이 과기자문회의에 참석하면 장관들이 저마다 '대면보고 기회를 달라'고 한다. 그러나 부처로 막상 돌아가면 관심이 없어지더라.

▶염한웅 교수 = 과기자문회의가 제대로 역할을 하기 위해선 의장인 대통령이 과학기술 아젠다에 관심을 보여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느끼지만, 임기 전반부에는 남북관계 이슈에 몰입하고 이후로는 감염병 위기에 봉착하면서, 대통령과 과학기술 의제를 폭넓게 논의할 기회를 애초 기대만큼은 갖지 못했다. 또 과기자문회의 심의회의에는 관계부처 장관들도 정부위원으로 참여하는데,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으면 이들도 오지 않는다. 정부가 '4차 산업혁명 위원회', '탄소중립위원회' 등 과학기술 분야의 각종 위원회를 신설하면서 과기자문회의의 역할을 쪼갠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신성철 전 카이스트 총장.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신성철 전 카이스트 총장.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
- 과기자문회의 독립성 확대를 위한 제언을 부탁드린다

▶김도연 이사장 = 과기자문회의는 정부의 주요 과학기술정책 등에 대해 비판과 반론을 제기할 수 있어야 독립성을 갖췄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결국 구성원의 의지에 달려 있다.

▶신성철 전 총장=싱크탱크인 자문회의와 집행을 맡는 정부조직과의 긴밀한 연계가 필요하다. 미국의 경우, 백악관에 과학기술정책실(OSTP)와 과학기술자문회의(PCAST)가 함께 있고, OSTP의 디렉터가 PCAST의 공동 위원장을 맡는다. PCAST의 자문 결과가 OSTP에서 바로 집행될 수 있는 셈이다. 반면 현재 과기자문회의는 단장으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장급이 파견 나와 있어 정책 집행력의 한계가 분명하다. 우리도 과학기술 부처 장관이 과기자문회의의 공동 부의장이 되는 게 바람직하다. 또 부의장 임기가 현재 1년인데, 감 잡다가 흘러가는 시간이다. 대통령 임기와 맞추는 게 좋다. 미국에선 공화당-민주당 정권이 바뀌어도 PCAST 인사는 계속 활용한 사례가 있다.

▶염한웅 교수 = 과기자문회의 부의장과 자문위원들의 임기가 지금은 1년이다. 이는 자문의 일관성을 고려할 때 바람직하지 않다. 적어도 2~3년 정도로 늘리는 방안을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

- 부처별로 산재한 과학기술 정책 관련 조정 기능을 통합·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김우식 이사장 = 참여정부 때 처음으로 과학기술 부총리가 설치됐다. 부총리의 핵심은 융합과 조정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발전대책을 만드는데 장점이 많았다. 매월 과학기술 관계장관들이 모여 치열하게 토의했지만, 부총리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며 의견을 취합했기 때문에 매우 효과적으로 기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후 정부에서 부총리제가 사라졌고, 부처 편제도 교육과 과학을 한 부처에 놓는다거나 미래창조를 강조하는 등 과학기술 육성 측면에선 퇴색됐다. 현 정부에서도 과기정통부가 있지만, 정보통신만 해도 영역이 너무나도 넓다. 새 정부에선 조정이 필요하며, 혁신의 사령탑으로 과기부총리제를 복원시켜야 한다.

▶김도연 이사장 =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또 다른 조직을 만들거나, 또는 청와대가 그 기능을 수행하게 하는 것에는 회의적이다. 이는 '과기정통부'가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할 일이다.

▶염한웅 교수=정부가 바뀔 때마다 나름의 방향성이 있는 만큼 과학기술·정보통신·산업 분야 등 부처를 나누고 붙이는 건 알아서 하면 된다. 다만 이를 아우르는 통합 거버넌스 구조가 있다면, 밑에서 어떻게 분리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그 부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경우 내각부 산하 '종합과학기술혁신회의'가 컨트롤타워인데, 과기자문회의가 이런 역할을 맡는다면 30조원의 국가 R&D 전체를 하나의 그림으로 조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대통령 서명한 자문안, 참고만 할건가…과학기술은 긴 호흡으로"
- 차기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김우식 이사장 = 기술패권을 놓고 각국이 혈안이 돼 있는 경쟁 상황에서 과학기술은 국가 발전의 핵심 수단이자 무기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의 현 시점 핵심 전략 기술이 무엇일지 생각해 봐도 내세울 만한 것이 마땅치 않다. 반도체를 얘기하지만, 그것도 이미 따라잡히고 있다. 차기 정부는 독창성 있는 기술 패권을 재빨리 육성하는 것을 필수 과제로 삼아야 한다. 이에 대해선 여야도, 좌우도, 정파도 없어야 한다.

▶김도연 이사장 = 긴 호흡의 장기적 정책 수립과 실천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국가 과학기술정책의 총괄책임자, 즉 장관이 오래 일할 수 있길 바란다. 여론이 전반적으로 나빠져서 이를 개각으로 돌파하는 일은 어느 정부에나 있게 마련이다. 이때 교체 장관수를 늘려 대규모 개각으로 보이기 위해 과기장관을 포함하는 일은 이제 없었으면 좋겠다.

▶신성철 전 총장 = 정치권이 국가를 위해서 집권한 것인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인지 곱씹어보길 바른다. 한국은 과학기술 선도국이 되기 위해 새로운 추진력이 필요한 시기다. 그만큼 집권 세력이 과학계에서 능력이 검증되고 회자되는 사람을 잘 써야 한다. 그래서 정치와 과학이 함께 가야 한다. 특히 과학기술계는 검증된 리더의 장기 리더십이 필요하다. 독일의 막스플랑크협회 연구소장들은 세계적인 학문적 성과를 갖추고 행정력까지 겸비한 사람들이 되는데, 장기간 자리를 지킨다. 중국도 기초과학 관련 연구소장을 만난 적 있는데, '임기(term)가 얼마나 되냐'고 물었더니 임기란 의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더라. 적어도 과학기술 분야에선 정권이 바뀌면 기관장을 갈아치우는 관행을 없애야 하고, 과학기술 인재의 자존심을 존중해야 한다.

▶염한웅 교수=모든 선진국에서 국민소득 4만달러가 되는 시점부터 정부의 공공부문 R&D가 대폭 늘어난다. 국민 생활과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R&D다. 우리도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 현재 국가 R&D 역량의 상당 부분이 산업부분에 집중돼 있는데, 이 부분을 줄여 공공 R&D로 돌려야 한다. 정부가 기초기술 R&D에 투자하고 기업에 기술이전까지 하면 되는 것일 뿐 기술 상용화까지 이끌 필요는 없다. 이는 기업에 맡기면 된다. 차기 정부는 이로써 줄일 수 있는 산업 부문의 R&D 자원을 공공에 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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