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1990년 12월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만나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는 모습을 당시 국립영화제작소가 영상물로 제작했다. /사진=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영상 캡처
고 홍순영 당시 외무부(현 외교부) 제2차관보가 소련 극동 연구지(Far East Affairs) 편집장과 1989년 4월 27일 면담을 하며 내놓은 발언이다. 외교부가 만들어진지 30년 된 외교문건을 중심으로 심의를 거쳐 기밀 해제·공개한 문건에 실린 내용이다. 노태우 정부가 북방정책일환인 소련과 국교를 위해 주한미군 철수까지 거론했던 것이다. 한소 수교 움직임에 반발한 북한이 소련을 향해 사절단을 철수시키겠다며 압박을 펼쳤던 내용도 실려 북방외교의 막전막후를 확인할 수 있다.
외교부의 기밀 해제 문건
훗날 외교통상부·통일부 장관을 지낸 홍 차관보는 1989년 4월 당시 "미일의 견제는 사실 무근"이라며 소련과 수교 등을 전제로 주한미군 철수가 가능하다는 의견까지 냈던 것이 기밀 해제 문건에 포함됐다.
김일성은 반발…대소련 압박 정황노태우 정부는 한소 정상회담에 속도를 냈지만 우여곡절에 직면했다. 1990년 6월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만나 한소 정상회담을 갖고 6개월 뒤인 12월 노 대통령이 방소해 또 다시 한소 정상회담을 가진 바 있다.
하지만 우선 북한이 한국과 소련의 대화 분위기에 강경 반발했다. 1989년 1월 쌍용건설 초청으로 방한한 미구엘 스테클로프 소련 연방상 고문은 "1989년 1월 세바르드나제 외상의 소련 방문시 김일성 주석과 최근 소련의 정책에 대해 심각한 의견 대립이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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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미구엘 고문은 "김일성 주석은 만일 소련이 헝가리식의 대한민국 관계 정상화 시에는 모스크바 주재 대사관 이외 공식 사절단의 전원 철수로 소련 외상을 위협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냉전 체제의 붕괴 와중에 한소 양국 수교는 진전됐다. 한소 수교 당시 양국 외무장관이 수교 시기를 기존 논의됐던 1991년 1월1일이 아닌 1990년 9월30일로 앞당겨 서명했던 정황이 담긴 문건도 나왔을 정도다. 우리 정부측에서 1990년 연내 수교를 소련측에 지속적으로 건의하면서 한국과 소련 외무장관이 만났던 당일(1990년 9월30)을 공식 수교일로 발표했던 것이다.
외교부의 기밀 해제 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