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왜 '성 중독' 치료한다면서 한인 여성에게 총을 쐈을까

뉴스1 제공 2021.03.18 16:17
글자크기

애틀랜타 총기 난사를 '증오 범죄'로 판단하기에 이르다는 경찰
'아시아 여성=순종적이고 성적으로 만만한 대상'이라는 편견

17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시내에서 8명이 숨진 총기 난사 사건 마사지숍 현장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꽃이 놓여 있다.. © 로이터=뉴스117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시내에서 8명이 숨진 총기 난사 사건 마사지숍 현장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꽃이 놓여 있다.. © 로이터=뉴스1


(서울=뉴스1) 이우연 기자 =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위치한 스파·마사지 업소에서 한인 여성 4명을 비롯해 8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총기 난사 참사가 일어났다. 경찰은 범행 동기를 특정하지 않았지만 브리핑하는 과정에서 용의자 로버트 에론 롱(21)이 성행위에 강박관념을 갖는 정신 질환에 걸렸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성 중독'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꺼냈다.

그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던 스파업소를 제거하는 것으로 성 중독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시아계 여성 6명이 사망한 이번 범행이 증오 범죄(hate crime)인지 판단하기에는 이르다고 말했다.



범죄를 저지른 용의자의 정신질환을 부각하는 것. 불현듯 5년 전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한 살인 사건이 떠오른다. 서울 강남의 노래방 건물에서 낯선 남성에 의해 20대 여성이 살해된 사건, 일명 '강남역 살인사건'이라 불리는 그 사건 말이다. 당시 가해자가 조현병을 앓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정신질환자가 저지른 사건이니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왔다. 정신병이 원인이냐, 여성혐오가 원인이냐는 논쟁은 꽤 치열하게 이어졌다. 언론도 이 같은 구도를 만드는데 예외는 아니었다.

애틀랜타 총기 난사 사건 역시 '성 중독'과 '아시아계 혐오' 중 범죄의 원인이 무엇이냐는 논쟁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다만 유력 미국 매체들은 그런 기계적인 접근법을 시도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대신 아시아계 미국인이 운영하고 근무하는 '스파 업소(실제 성매매가 이뤄지는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를 자신을 유혹하는, 총으로 쏴 없애버려야 할 것으로 인식한 배경에는 미국의 뿌리 깊은 '아시아 여성 혐오'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개인의 정신병적 증상에 사회적 맥락이 반영돼 있는 점을 지적한 셈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성 중독에 걸린 것은 날 유혹하는 아시아 여성 너희 때문이야'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CNN·NBC방송은 아시아계 여성이 사망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전문가의 의견을 보도했다. 미국에서 아시아계 여성은 '순종적이고 유순하며 성적으로 만만한' 대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들 매체는 공통으로 아시아계 여성에 대한 혐오의 기원으로 1875년 제정된 '페이지법', 일명 '중국인 배척법'을 거론했다. 이법은 미국에 입국하려는 모든 동아시아 여성을 성노동자로 간주하고 이민을 금지했다. 금이 발견된 캘리포니아로 일하기 위해 몰려온 중국 남성들과, 매춘부·가사 도우미·첩 등의 역할을 위해 비자발적으로 미국으로 끌려온 중국 여성들로부터 미국을 지킨다는 명분에서였다.


특히 당시 미국 의학 협회는 중국 이민자들이 백인들이 옮으면 죽을 수 있는 세균을 갖고 있다고 발표했고, 백인들은 중국 여성들이 성매매를 통해 백인 남성에게 세균과 질병을 옮긴다고 믿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최근 들어 증가한 '아시아 혐오' 정서의 촉발제가 된 것과 겹쳐진다.

17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차이나타운에서 '애틀랜타주 총격 사건'과 관련해 아시아인 대상 증오 범죄를 규탄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다. © AFP=뉴스117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차이나타운에서 '애틀랜타주 총격 사건'과 관련해 아시아인 대상 증오 범죄를 규탄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다. © AFP=뉴스1
이어 미국은 '필리핀-미군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그리고 '한국전쟁') 등 아시아에서 일어난 전쟁에 미군을 파견하며 성매매를 장려해오고 관련 산업을 후원해왔다고 CNN은 지적했다. 아시아 여성을 바라보는 잘못된 시선은 대중 문화에서도 발견된다.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풀 메탈 재킷'에서 미군 앞을 지나가던 베트남 성노동자 여성이 문법이 맞지 않는 영어로 '나는 너를 오랫동안 사랑했다(Me love you long time)'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을 고착화한 대표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특히 현대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인은 '모범적인 소수민족(model minority)'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저임금 서비스 분야에서 일하는 일부 아시아 여성이 받는 차별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왔다. 워싱턴포스트(WP)는 "아시아계 미국인은 사회에서 성공했고, 부유하며, 고학력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아시아계 미국 여성들이 자신들이 차별의 타겟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예를 늘어놓지 않아도 아시아 여성과 관련된 통계는 비극을 예견하고 있었다. 비영리 단체 '아시아·태평양계 미국인을 위한 증오 중단'(Stop AAPI Hate)의 발표에 따르면 코로나19가 퍼진 1년간 미국에서 보고된 아시아계 상대 증오 범죄 중 68%가 여성 피해자로 남성 피해자는 29%였다. 코로나19를 차치하고라도 살면서 한 번 이상 물리적 또는 성적 폭력을 당한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이 최대 55%라는 아시아태평양 성별기반폭력 연구소의 결과도 나왔다.

경찰의 '성 중독' 발표에도 이번 사건은 이미 '증오 범죄'로 규정되는 분위기다. 미국 내 많은 정치인과 유명인사들은 이번 사건이 아시아계 여성에 대한 혐오를 보여주는 범죄라고 지적하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이번 사태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매우 우려하는 것을 알고 있다"며 범행 동기가 명확히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