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주나라 사관으로 알려진 주임의 말을 인용하며 타일렀다. "능력을 펼쳐 자리에 나아가되 할 수 없을 경우에는 그만두라고 했다. 위태로운데도 잡아주지 않고, 엎어지는데도 붙들지 않는다면 그 신하를 어디에 쓰겠느냐? 호랑이와 코뿔소가 우리에서 뛰쳐나오고, 거북껍질과 옥이 궤 안에서 훼손됐다면 이것이 누구의 잘못이겠느냐?"
막을 수 없을 땐 그만 두라는 게 공자의 말씀이다. 설마 직언이 먹히지 않을 때마다 무조건 사표를 던지란 뜻은 아닐 것이다. 윗사람이 절대 해서는 안 될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려 하는 결정적인 순간엔 직을 걸고 막으라는 얘기일 터다. 그게 참모된 도리라는 뜻일 게다.
보스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려 할 때 부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원한 딜레마다. 당연히 막아야 하겠지만,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막으려 했다가 험한 꼴만 당할지도 모른다. 정답은 없다. 그냥 못 이긴 척 따라줘도 다행히 별 탈이 없을 수도 있다. 때론 그걸 막지 못한 죗값을 치러야 할 수도 있다. 결국 운이다.
"인사실에서 막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처장님의 강한 의지를 꺾지 못했다." 3년 전 대법원 소속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실이 작성한 '정기인사 후기'에 담긴 내용이다. 당시 법원행정처장은 박병대 전 대법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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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수사에 따르면 당시 행정처는 일부 판사들에게 해외 파견 배제 등 인사상 불이익을 줬다.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다. 상고법원 도입을 비롯한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정책에 반기를 든 판사들이 타깃이었다.
실무진은 반대했지만 '윗선'의 의지는 확고했다. 훗날 문제가 될 걸 예견했을까. 인사 실무를 맡은 판사들은 '정기인사 후기' 문건에 스스로 '면죄부'를 남겼다. "법관 인사는 인사실에서 각종 기초자료를 작성하지만 처장님이 인사안을 짜서 내려주신다."
자신들이 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실무진의 책임이 사라질까.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박 전 처장은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로 그런 지시를 내렸을까. 만약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면 박 전 처장은 책임이 없을까. 간단치 않은 문제다.
주동자와 추종자가 있는 범죄에서 어느 선까지 처벌을 받아야 할까? 다산 정약용은 형법연구서 '흠흠신서'(欽欽新書)에서 이런 경우 주동자만 엄히 다스리고 추종자는 관대하게 처분하라고 했다.
만약 반대로 아랫사람만 구속하고 윗사람은 풀어준다면 어떨까. 있을 법 하지 않지만, 현재 서초동에선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은 이미 구속됐지만, 그의 상급자로서 혐의가 겹치는 박 전 처장과 고영한 전 행정처장은 구속영장이 기각돼 아직도 자유를 누리고 있다. 다산이 봤다면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