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 '비밀출산' 허용하면 아기 안 버릴까?

머니투데이 박보희 , 안채원 인턴 기자 2018.11.21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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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 [축복과 절망 사이] ③ 보편적 출생등록제 전제돼야…임신부터 출산까지 종합지원체계 마련이 우선

그래픽=이지혜 디자인기자그래픽=이지혜 디자인기자


"베이비박스에 아기들이 오는 것은 법과 제도의 미비 때문이다. 아이를 지키고 싶은데 출생신고를 도저히 못하는 상황인 부모들이 오는 것이다."(이종락 주사랑공동체 목사)

일각에서는 출생기록이 남을 것을 두려워한 부모들이 베이비박스를 찾는다며 '비밀출산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출산 기록이 남지 않도록 비밀을 보장해준다면 부모가 아이를 유기하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란 취지다.



그러나 '보편적 출생등록제'도 시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비밀출산제를 먼저 논의하는 것은 선후가 바뀐 임시방편일 뿐이라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들은 먼저 모든 아동의 출생등록이 누락되지 않을 방법을 마련하면서, 사각지대를 메우기위한 방안으로 비밀출산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밀출산제가 '베이비박스' 논란의 답이 될 수 있을까?



◇ 비밀출산제…친부모 익명 보장, 출생기록은 법원으로

아이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한다. 일견 당연해보이는 이 과정이 여의치않은 이들이 있다. 이들이 출산 기록을 남기지 않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비밀출산제다.

출생신고 문제 때문에 아동 유기가 일어난다는 지적이 나오자 지난 2월 오신환 바른미래당 의원은 '임산부 지원 확대와 비밀출산에 관한 특별법' 제정안을 발의했다. 법안은 '임신·출산 사실을 은폐하고자 하거나 양육할 수 없음을 예상하는 등 경제적·사회적 곤경에 처한 임산부를 지원해 영아가 친부모에게서 양육될 수 있는 사회·경제적 환경을 조성'하자는 취지를 담았다.


법안에 따르면 임산부가 비밀출산 의사를 밝히면 담당 기관은 △임산부 신원의 익명성을 보장하며 △안전하게 출산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출산 후 아기 보호, 후견, 입양 절차 등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돕는다. 또 비밀출산으로 낳은 아이를 △본인이 양육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여의지 않을 경우 입양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한다. 비밀출산 된 아기의 출생증명서는 가정법원에 제출하록 했다.

베이비박스를 운영인 주사랑공동체의 이 목사는 "병원에서 바로 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하고 기록은 법원에만 남도록 하고 있다"며 "임신부터 출산까지 정부에서 지원할 수 있도록 비밀출산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보편적 출생등록제' 도입 후 '사각지대' 비밀출산제로 메워야"

전문가들은 비밀출산제의 필요성에 대해 일견 동의한다. 다만 '보편적 출생등록제'가 전제가 된 비밀출산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현재 시행 중인 출생신고제의 허점을 먼저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현재 출생신고는 전적으로 부모에게 맡겨져 있다.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으면 아동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극단적으로 아이가 태어났다 사망해도 정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실제 2017년 부산에서 30대 여성이 신생아 2명의 시신을 냉장고에 보관한 것이 드러났다. 그중 한 아이는 병원에서 낳았지만 출생신고조차 안돼 있었다.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려고 해도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A씨는 이혼 소송 중 다른 남자와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 출생신고를 하려했지만, 담당 공무원은 전 남편이 법률상 친부로 추정돼 출생신고가 안된다며 먼저 소송으로 친자관계를 정리한 후 판결문을 가지고 오라고 돌려보냈다. 전 남편과 연락이 되지 않았고 소송을 하려면 수백만원이 들었다. 결국 아이는 11세가 될 때까지 출생신고를 하지 못했다. 출생신고가 안돼있으니 학교도 병원도 갈 수 없었다.

한국 비영리단체(NPO) 연대는 유엔(UN)아동권리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출생신고되지 않은 아동을 파악할 수 있는 방안은 없고, 부모가 고의 또는 과실로 출생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 공적기관이 아동의 출생 등록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방안은 부재하다"고 지적하며 "보편적 출생등록제도가 시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보편적 출생등록제 시행을 권고한 바 있다.

보편적 출생등록제란 부모의 법적 지위, 출생 지역과 장소 등 어떤 요소나 출생 여건과 관계 없이 국가 내 모든 아동의 출생을 등록하는 제도를 말한다. △의료기관이 직접 출생신고를 하도록 하는 '출생자동등록제' △의료기관은 담당 기관에 출생 통보만 하고 이후 보호자가 상세 사항을 신고하는 '출생통보제' 등이 방안으로 나온다.

선진국에선 이미 보편적 출생등록제가 시행 중이다. 미국과 캐나다는 아기가 출생한 의료기관 등에서 출생증명서를 지역 담당관에 제출한다. 영국은 아동이 출생하면 병원 등록 시스템을 통해 출생아에 대한 의료보장번호가 발급된다. 독일은 부모와 병원에 동시에 출생신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 독일 '임신'부터 '출산후'까지 지원하는 '신뢰출산제'…산모·아동 보호가 우선

일각에서는 보편적 출생등록제가 시행되면 출산 기록 남기고 싶지 않은 이들이 병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출산을 하는 등 오히려 산모와 태아를 위험하게 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사실 현재 출생신고를 해도 기록에 드러나지 않도록 할 방법은 있다. 정부는 기록이 남는 것이 두려워 출생신고를 하지 않는 이들을 보호하기위해 2016년부터 증명서를 세분화했다. '현재의 가족관계·신분 사항' 등 필수 정보만 담긴 '일반증명서'를 원칙적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전체 정보가 기재된 '상세증명서'는 특별한 경우에만 이유를 설명한 뒤 발급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생기록을 남길 수 없는 이들을 위한 대안이 비밀출산제다. 소라미 변호사는 "비밀출산제는 모든 아동의 출생 등록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논의돼야하는데 현재 한국은 이같은 제도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며 "보편적 출생등록제 도입을 전제로 검토돼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비밀출산제는 단지 '산모의 익명성'이 아니라 '위기상황의 산모'를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논의돼야 한다는 얘기다.

독일은 '신뢰출산제'라는 이름으로 산모에 대한 종합지원체계를 마련해뒀다. 2000년부터 베이비박스가 설치되기 시작한 독일은 장기간의 논의를 거쳐 '임신여성 지원확대 및 신뢰출산에 관한 법률'를 제정, 시행 중이다. 정부는 '임신갈등상담소'를 통해 산모가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임신과 출산 전 과정에 대한 전문 상담과 지원을 제공한다. 산모가 비밀출산을 원할 경우 의료기관에서 익명으로 자녀를 출산할 수 있다. 출생증명서는 공공기관 등에서 보관하고 자녀는 만16세가 된 이후 확인할 수 있다.

소 변호사는 "해외에서 도입·시행 중인 비밀출산제는 단순히 출산기록과 같은 형식적인 논의에 방점을 두고 있지 않다"며 "오히려 어떻게 하면 위기상황의 산모가 고립된 상태로 출산을 하지 않도록, 그래서 산모와 아동의 생명이 위태롭지 않도록 할 것인지를 목표로 안전한 임신과 출산, 실질적인 양육 지원 체계를 마련하고 있고, 그 일부로 출산 기록을 제한하는 방법이 포함돼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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