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잔인한 달…" 한미 FTA 협상장 숙연하게 만든 전략가

머니투데이 정혜윤 기자 2018.05.14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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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한국의 칼라 힐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실장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실장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실장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지난 2월 서울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2차 개정협상 마지막 날, 미국과 입장차가 커 평행선을 달리자 한국측 수석대표인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실장은 T.S. 엘리엇의 ‘황무지’ 시 구절을 읊었다.

유 실장은 “봄이 왔는데 마음이 겨울인 상태를 나타낸 엘리엇의 시처럼 터널 밖 불빛이 안 보이는 암담한 상황이었다”며 당시를 돌아봤다. 그는 “시작할 때 날씨도 어둡고 모든 게 힘들었지만, 협상이 끝날 때쯤 양측이 길을 찾고 날도 개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냉철한 협상가로 정평이 난 유 실장이 이 시를 읊자 협상장이 순간 숙연해졌다고 한다. 협상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은 “미국도 같은 입장이어서 더 공감했던 것 같다”고 했다.

이후 양측은 입장차를 좁혀 갔고 결국 한미 FTA는 총 3차례 공식 협상 끝에 ‘원칙적 합의’에 도달했다. 한미 FTA 개정협상은 현재 막바지 문구 작업을 벌이고 있다. 유 실장은 “협상가는 큰 그림과 디테일을 동시에 봐야 한다”며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는 말처럼 협정문에 담긴 숫자 하나하나가 국민에게 의무와 권리가 되기 때문에 문구에 신경 쓰고 있다”고 했다.



유 실장은 26년간의 공직생활 동안 미국을 상대로 10년 넘게 협상을 이끌었다. 이외에도 한·싱가포르, 한·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FTA 등 굵직한 통상협상 실무를 담당했다.

그동안의 협상 중 힘들었던 순간을 꼽아달라고 하자 “새벽이 되기 전 가장 어둡 듯, 모든 협상이 타결 직전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한쪽이 100% 만족하는 협상은 없다”며 “상대방도 계속 불만을 제기할테고 우리도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게 어떤 건지 끊임없이 자문하고 타이밍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실장은 항상 첫 번째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녔다. 통상산업부(현 산업부) 첫 여성 사무관, 산업부 첫 여성 국장 등을 거쳐 지난 1월 첫 여성 1급이 됐다. 한국의 칼라 힐스(전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 웬디 커틀러(전 USTR 대표보)라는 별명도 있다.


그는 “뭐든 1호다 보니 책임감을 많이 느낀다”며 “누구를 ‘롤 모델’로 삼을 수 없었고, 항상 내 길은 내가 만든다는 느낌으로 헤쳐 나갔다”고 했다. 이어 “운이 좋게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늘 감사하다”며 “두 아이를 키우면서, 자는 시간을 아끼며 매 순간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혹 하나님이 젊음을 돌려준다 해도 ‘노 땡큐’라고 답할 것 같다”고 했다.

유 실장은 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통상 전문가를 기를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순환 보직이 많아 전문성을 축적하기 힘든 환경”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후배들을 위해 협상 순간 고려했던 요인, 전략 등을 엮어 책을 내고 싶다”는 바램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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