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루팡’ 양산 임금체계, 바꾸는 게 답

머니투데이 김남이 기자 2018.01.01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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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70년 묵은 임금체계 이제는 바꾸자]①생산직 호봉제 70%...성과와 임금의 괴리 발생

편집자주 1950년대부터 한국 산업사와 함께 해온 임금체계가 연공서열 방식의 호봉제입니다. 1970~80년대 고도성장기에 적합했던 이 제도는 저성장은 물론 저출산·고령화 국면에 접어들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하루가 다르게 기술의 진보가 이뤄지고 있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엔 70년 묵은 낡은 임금체계가 노사문제의 범주에서 벗어나 산업경쟁력을 저하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글로벌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임금체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에 머니투데이는 기존 연공서열 방식의 호봉제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해외사례 제시를 통해 대안을 모색합니다.

‘월급루팡’ 양산 임금체계, 바꾸는 게 답


#국내 A제약회사에 다니는 박지원 팀장(가명·48)은 팀원들 사이에서 '월급루팡'으로 통한다. 팀원보다 항상 30분 늦게 출근하고, 오전 시간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보낸다. 점심 후에는 회의실 문을 걸어 잠그고 낮잠을 잔다. 금요일은 항상 외근을 핑계로 일찍 회사 문을 나선다. 박 팀장의 연봉은 8000만원. 팀원들의 속은 타지만 루팡처럼 임원들의 눈을 잘 피하고, 사이까지 좋다.

#B사는 해외공장을 설립하면서 생산직에 국내와 유사한 호봉급을 도입했다. 3년 지난 시점에 관리부장은 현지 생산직 직원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 "나와 내 동료는 생산라인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 왜 월급이 다른가요? 나보다 1년 먼저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일을 하고, 성과도 비슷한데 급여 차이가 나는 것이 이상해요."



70년 가까이 묵은 낡은 임금체계가 '월급루팡'을 만들고 있다. 월급루팡은 회사에서 하는 일 없이 월급만 축내는 직원을 일컫는다. 보통 월급도둑으로 불리지만 젊은 세대에서는 '괴도 뤼팽'의 이름을 붙여 표현한다.

1950년대부터 이어져 온 연공급(호봉제) 임금체계는 노사갈등의 시작점일 뿐만 아니라 제조업 경쟁력 저하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호봉제는 성과나 능력, 직무, 역할과 상관없이 해가 바뀌면 자동적으로 임금이 오른다. '근속연수만 채우면 된다는'식의 시간 때우기 인식이 근로자들 사이에 팽배한 이유다.



◇대기업 제조업 70% 호봉제…성과 따로, 임금 따로= 많은 기업이 연공급 임금체계를 바꾸려고 했으나 기존 관행 유지와 노조의 반대로 성공한 사례가 적다. 특히 생산직은 연공급이 대세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매출 500대 기업의 생산직 근로자 중 70.6%가 호봉제를 유지하고 있다.

70~80년대와 같이 해마다 고성장을 지속하고, 구성원들의 직무난이도와 성과 기여도에 차이가 없을 때는 연공급 임금체계 적용이 가능하지만 오늘날 같이 저성장 경영환경에서는 연공급 적용이 어렵다. 나이가 들면 생산성이 떨어지는 게 일반적인데, 임금은 높아지는 상황을 성장이 멈춘 기업이 감당하기 쉽지 않다.

이와 함께 성과와 임금의 연동성이 낮아지면서 신입직원들의 의욕 저하 문제점도 나온다. 저성장 시대 기업의 임금 지불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데, 성과 열매를 대부분 근속연수가 높은 근로자가 받는다. '월급 루팡'에 대한 불만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하상우 한국경영자총협회 경제조사본부장은 "저성장 기조 장기화, 고령화 속에서 우리 임금체계는 과거 고도성장기 형성된 연공형 임금체계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며 "임금수준과 생산성의 괴리는 근로자간 공정한 성과배분을 가로막고, 신규채용을 위축시킨다"고 말했다.

‘시간’ 중심의 임금체계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직무나 능력, 성과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 본부장은 "장시간 근로 문제 역시 성과와 생산성에 따른 임금체계가 아닌 근로시간 위주의 임금체계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했다.



◇능력 좋은 직원 이직 고민…직무급·역할급 등이 대안= 앞의 B사 사례에서 봤듯이 우리가 일반적이라고 생각해온 연공급이 해외에서는 생소하다. 연공급 체계에서는 성과가 좋은 직원일수록 짧은 기간 내에 이직을 고민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국내 기업은 '로열티(충성심) 부족'으로 치부하는데 근본적인 문제는 임금체계에 있다는 지적이다.

이 문제는 국내에서도 발생한다. 현행 임금체계의 문제점을 묻는 질문(한국경제연구원, 2017년)에 42.7%가 ‘보상수준이 비슷해 무임승차가 발생한다'고 답했다. 이어 ‘고급인력 유치 난항’(32.2%), 상대적 고임금으로 경쟁력 확보 어려움(11.6%) 순이었다.

결국 당면한 노무 문제와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직무·성과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이 필요하다. 연공급의 대안으로는 △직무가치 중심의 직무급 △근로자의 숙련도와 역량 중심의 직능급 △역할의 크기와 성과 중심의 역할급 △개인성과와 집단 성과 중심의 성과급이 제시된다.



한경연의 조사결과 대기업들은 업무의 성격과 난이도’에 따라 임금이 달라지는 ‘직무급’을 대안으로 우선 꼽았다. 미국을 포함한 서구에서 주로 쓰는 임금 체계로 직무의 변화가 없는 한 원칙적으로 같은 임금을 받는다.

하지만 국내 상황에서 직무급 도입은 무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지만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직무급만 하나의 대안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짙은데, 직무급 도입이 쉽지는 않다"며 "호봉제에서 직무급제로 전환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뿐더러 직무가 수시로 변하는 것이 반영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개별기업의 지불 능력, 업무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면 직무급이 새로운 경직된 임금체계가 될 수 있다"며 "엄마와 아들이 같은 라면을 끓여도 맛이 다른 것처럼 직무 수행 역량도 임금 체계에 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재근 대한상의 기업환경조사 본부장은 새 임금체계를 위해 취업규칙 조정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 본부장은 "현재 근로기준법은 근로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취업규칙을 고칠 수가 없다"며 "좀 더 유연하게 임금 및 근로시간 등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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