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소염전의 석양./사진=이호준 작가
오늘은 일진이 썩 좋지는 않은 날인 것 같다. 날씨 정보를 확인하지 않고 길을 떠난 탓이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었으니, 염전으로서는 반갑지 않은 날씨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염부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따라 바람도 마뜩치 않다. 그래도 결정지에는 막 엉기고 있는 소금이 둥둥 떠다닌다. 염전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염창(소금창고)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맑은 하늘이든 염부든 기다려볼 심산이다. 이곳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실타래 풀 듯 뻗어 나간 수로들이, 바다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염분 가득 머금은 바닷물을 데려 올 것이다.
소금 꽃은 홀로 피어나는 게 아니다. 햇볕은 물론 적당한 바람과 염부의 땀과 시간을 품어야 피는 꽃이다. 염전에서는 바닷물만 졸이는 게 아니라 시간도 함께 졸인다. 시간의 정수(精髓)가 순백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좋은 소금을 만들기 위한 염부의 일상은 고단하다. 별이 지기 전에 일어나 하루 종일 바닷물과 씨름한다. 염부의 몸이 까맣게 탈수록, 더욱 하얗고 맛좋은 소금이 태어나는 것이다. 비라도 내리면 염부들은 마음까지 까맣게 탄다. 애써 조린 소금물에 빗물이 섞이면 만사 헛일이기 때문이다.
곰소염전 결정지에서 소금이 막 엉기고 있다./사진=이호준 작가
염부는 끝내 오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파질이 들어있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건 포기한지 오래지만, 이런 기다림의 시간은 쌉쌀하면서도 달콤하다. 누군가 내 기다림을 헤아린 걸까?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마치 이불 개듯 차곡차곡 구름을 걷어내기 시작한다. 저녁때가 다 돼서 무슨 조화람?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선다. 기다림은 이렇게 예기치 않는 행복을 주기도 한다. 갈라진 구름 사이로 벌건 해가 얼굴을 내민다. 고대하던 석양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결정지에서 혼자 자맥질하는 저녁 햇살이 아깝지만, 지금은 일을 하는 시간이 아니다. 저녁나절의 햇볕은 바닷물을 졸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쪽 하늘이 붉게 타오르면서 염전에도 황금빛 주단이 깔리기 시작한다. 저만치 서 있던 산 그림자가 뚜벅뚜벅 걸어와 키를 부풀린다. 먼 산들은 자꾸 제 모습을 지워가고 붉은 해는 거친 숨을 몰아쉰다. 어느 순간 공기가 팽팽해지는가 싶더니 붉은 덩어리가 툭, 하고 떨어진다. 기다렸다는 듯이 맹렬한 공복이 전신을 훑는다.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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