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불멸의 사랑, 절절한 그리움 시로 승화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2017.03.04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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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이경애 시인 ‘견고한 새벽’

[시인의 집] 불멸의 사랑, 절절한 그리움 시로 승화


사랑은 참 알 수 없다. 그것은 젊어도, 나이를 먹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나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 또한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혹은 같이 움직이는 것이 그리움이고 기다림이다. 이경애 시인(1960~ )의 첫 번째 시집 ‘견고한 새벽’은 가슴 절절한 사랑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시로 승화시켰다.

그 흔한 해설이나 발문조차 없는 이번 시집에는, 한 권 분량으로는 다소 많은 100편의 시가 세 개의 이야기로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 이야기 ‘사랑, 그 너머의 사랑’에서는 이 시집의 전체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사랑과 그리움, 사랑하는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이 절절하다.



두 번째 이야기 ‘사람, 어깨가 무거울 때’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쓸쓸하고 외로운 삶들을 따스한 마음으로 감싸고 있다. 세 번째 이야기 ‘삶, 살아진다는 것’에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타향살이의 고단함, 그리고 힘겹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시인의 고투를 다루고 있다.

나비는 꽃을 가려 앉지 않고
바람은 한 가지에 매이지 않습니다



세상 어느 것 하나도 내것
아닌 것이 없으나 달리 보면
세상 무엇 하나도 내것이 될 수 없어
간절이 구차한 밤
미처 닦아내지 못한 더위를 물리려
앞창, 뒤창 다 열어 바람길을 트는데
늦도록 남은 꽃, 시울이 붉습니다
철 이른 풀벌레 울음 기어오르는 마루에 누워
바람과 달과 꽃을 낙낙히 보노라니
바람은 그만 가자 손목을 끄는데
저 꽃, 미동도 않고
폐궁(廢宮)의 한을 써내려 갑니다
한 줄 쓰면 마른잎이 수런거리고
또 한 줄 쓰면 달빛이 흐려지고
구구절절 애곡단장.

한 철 살다 가는
꽃의 사연 읽느라 별이 지는데
사계가 무성한 당신은
단 한 줄도 읽히지 않습니다.
- ‘능소화’ 전문


소유와 미련, 길(인생)에 대한 소회가 잘 어우러진 시 ‘능소화’는 궁극적으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깊은 여름밤, 시인은 “미처 닦아내지 못한 더위를 물리려” 마루에 누워 창밖 바람에 흔들리는 능소화를 보고 있다. “철 이른 풀벌레 울음”이나 “바람과 달과 꽃을 낙낙히 보노라니”, “세상 어느 것 하나도 내 것/ 아닌 것이 없"는 유유자적한 삶의 풍광이지만 왠지 마음은 옹색하고 구차스럽다.


“바람은 그만 가자 손목을 끄는데”도 “저 꽃”은 폐궁(廢宮)의 몸, 즉 ‘지는 꽃’이므로 단지 흔들릴 뿐이다. “바람은 한 가지에 매이지 않”지만 한 자리에 붙박인 꽃은 떠날 수 없는 것. 한 곳에 머물지 않는 바람과 난 자리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꽃은 애당초 가야 할 길이 다른 것이다. “한 철 살다 가는/ 꽃의 사연 읽”던 시인은 문득 깨닫는다. 한 계절도 아닌 “사계가 무성한 당신”을 “단 한 줄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화려한 삶을 사는 당신과 달리 ‘나’의 소극적인 행동과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잉잉거리며 벌치는 사내나 따라 나설까
싸리꽃처럼 새초롬하니,
은꿩의다리 모냥 가냥가냥,
따라나 갈까
사내는 벌통을 놓고
꽃이 되려나 새가 되려나 모르는
나는 향기를 나르고 노래를 나르고
벌도 없는 한낮
너럭바위에 드러누워 딱총딱총
빠알간 콩알로 총쌈이나 할까
세상이 온통 나를 기일지라도, 밤마다
그 사내 버얼건 등짝에다 북극성을 띄우고
길을 잃지 않으면
길을 잃지 않으면, 나 온전히
돌아와 첫눈 오는 소리 들으리
- ‘8월’ 전문


반면 시 ‘8월’은 좀 더 적극적이다. “벌치는 사내를 따라 나”서 “향기를 나르고 노래를 나르고”, 사내와 너럭바위에 드러누워 총쌈을 하고, 심지어 “그 사내의 버얼건 등짝에다가 북극성을 띄우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낸다. 하지만 “온전히/ 돌아와 첫눈 오는 소리” 듣겠다고 하여 잠시 마음이 흔들렸을지는 모르지만 ‘온전히’ 제자리로 돌아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겠다는 사무치는 그리움을 드러낸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는 사랑도 있다지만 더 깊어지는 사랑도 있는 법. 사랑하는 “그대의 선한 눈물이/ 나의 왼쪽 가슴으로 들어와/ 측은한 내 심장을 에둘러 흐르는/ 강 하나를 만드는 동안/ 나는/ 조금씩 솟아올라/ 그대의/ 섬이 되었다”(‘섬’ 전문)면, 그 사랑은 결국 “불멸”(이하 ‘나비’)인 셈이다. 신(神)도 어찌할 수 없는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당신은 매일 유서를 쓰고/ 나는 읽고 지우고/ 핏기 가신 우리들의 봄이/ 빠르게 지나”갔기에 사랑은, 그리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별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힘겨워하는 시인은 자신에게 묻는다.

다시 한 번, 사랑
목숨 걸고 덤벼보고 싶다면, 나
미친 것인가
- ‘박하사탕’ 부분


◇견고한 새벽=이경애 지음. 파피루스북 펴냄. 128쪽/1만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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