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군 부재자투표 양심선언'으로 군 비리를 폭로한 이지문 한국청렴운동본부 본부장은 이제 '청탁금지법' 강사로 활동하며 또 다른 부패 방지에 힘쓰고 있다./ 사진=홍봉진 기자
"말로만 '1번 찍어'라고 했다면 넘어갔을 수도 있죠. 하지만 4개 중대 중 2개 중대는 아예 중대장, 중·상사가 보는 앞에서 공개 투표를 시켰어요.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걸 막기 위해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복무 기간에만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군대 생활 꼬일 필요 뭐 있냐." 주변 장교들에게 함께 양심선언을 하자고 제안하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이 중위도 겁이 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전에 내부고발을 했던 군인들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알았고, 인생이 잘못될 수도 있었다.
모든 걸 잃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중위 파면에 불복하는 항소를 낸 이 중위는 전역한 부대원들을 수소문해 일일이 찾아갔다. '다 지난 일'이라며 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행히도 선배 장교 1명, 사병 2명이 2심 재판 현장에 나와 양심선언을 했다. 이 중위는 다시 장교로 복귀했고, 그의 고발이 진실이었음이 밝혀졌다. 3년이라는 긴 시간 끝에 이뤄낸 결과였다.
"인생의 암흑기였어요." 이 중위의 고발은 그에게 암흑기를 남겼지만 60만 국군 장병에게는 비밀 투표의 권리를 남겼다. 고발 사건 이후 군 부재자 투표가 부대 밖에서 진행되는 '영외투표제'가 도입된 것이다. "법 개정이라는 성과가 있었으니 다행이죠. 준비를 좀 더 치밀하게 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고발한 것에 대한 후회는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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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軍 비리 폭로부터 김영란법까지…'부패와의 전쟁'
군의 부패를 폭로한 이후 '부패 방지'는 그의 인생이 됐다. 1995년 서울시의원을 지낸 후 대학원에서 부패 방지에 대해 더 공부하기로 결심한 그는 선거 대신 추첨을 통해 국회.지방 의원을 선출하자는 '추첨민주주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업과 동시에 공익 제보자 모임, 호루라기 재단, 현재는 한국청렴운동본부 본부장 등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며 공익 제보자들의 인권을 위해서도 힘쓰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부패 방지'를 주제로 강의를 해온 이지문 한국청렴운동본부 본부장은 최근 들어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여러 단체에서 강의 요청이 쇄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속 상급자나 기관장이 부정청탁을 받아서 지시할 경우에도 갈등할 필요가 없는 게 이 법의 미덕이라고 이 본부장은 말한다. "지금까지는 직속 상급자가 지시하면 거부하기가 어려웠어요. 인사평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거부하고 신고하면 상급자가 형사 처분을 받게 됐죠. 형사 처분을 각오하면서까지 부정청탁을 받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청탁금지법 위반 사례를 적발해 신고하면 포상금 최대 2억 원, 보상금 최대 30억 원까지 받을 수 있다. 포상금액이 알려지자 '란파라치'(김영란법+파파라치의 합성어·부정청탁금지법 위반자를 쫓는 공익 제보자)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이 본부장은 내부 고발자에게도 청탁금지법 제보자처럼 확실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현재 내부 고발자에 대한 보상 제도는 너무 열악해요. 고발의 경제적 가치를 수량화해서 그만큼의 돈을 해당 기업이 지급하게 하는 등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부패하는 사람에게는 잘못하면 돈으로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야 부패의 뿌리를 뽑을 수 있어요."
군 비리 내부고발, '민주주의=선거'라는 공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추첨 민주주의' 등 이지문 본부장이 걸어온 길은 언제나 사회의 중심 '밖'이었다. "저는 운동권도 아니었고, 대단한 양심이나 학식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제가 하는 이야기는 '아웃사이더적 발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들리는 이유는 사회의 뿌리를 흔들어야 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부패 문제가 심각해서죠. 내부고발이 필요 없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획기적이고 과감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