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왼쪽부터)이준, 이상설, 이위종./사진=위키피디아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과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린 뒤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특사는 이준, 이상설, 이위종으로 정해졌다.
그는 고종의 밀서를 들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을 만난 뒤 러시아 횡단철도를 이용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과 합류한다. 고국을 떠난 지 두 달여 만인 6월 25일 그는 헤이그에 도착한다.
회의장 입장이 거부된 이준 일행은 각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불어로 된 호소문을 배부했다. 이 호소문엔 '을사늑약은 일본이 무장 병력을 사용해 고종의 승인없이 체결한 것으로 국제법에 위반돼 무효'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들의 노력으로 만국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 de la Paix) 6월 30일자에 '왜 대한제국을 제외시키는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도되면서 이목을 끌게 된다. 평화회의보는 이후 이준 일행과 인터뷰를 하고, 이들의 기자협회 연설을 주선하는 등의 활동을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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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각국 대표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여론도 대한제국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정도에서 그쳤다. 결국 109년 전 오늘(1907년 7월 14일) 이준 열사는 통분을 참지 못하고 헤이그에서 분사(憤死)했다.
이위종은 이후 평화회의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준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전날 의식을 잃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저녁 때 의식을 되찾아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이 나라를 구해주소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탈하려 합니다'하면서 가슴을 쥐어뜯다 숨을 거두었다"고 밝혔다.
헤이그 특사가 빌미가 돼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그 해 7월 20일 순종에게 황권을 넘기는 양위식을 강행한다. 이준 열사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이듬해엔 헤이그 공동묘지에 있던 그의 유해가 서울 수유리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