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아버지·낙제생 아들의 '180도 다른' 성공스토리

머니투데이 최중혁 기자 2015.02.25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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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다인재 캠페인]'루저' 없는 사회-성공의 기준을 바꾸자④ 놀공발전소 피터 리 대표

편집자주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누구나 고통스러운 입시전쟁, 스펙경쟁, 취업경쟁에 직면합니다. 하지만 목표를 이룬 이는 극소수이고, 대다수는 이른바 '루저(loser, 패자)'로 전락합니다. 도대체 왜 대한민국에는 이토록 루저들이 넘쳐나는 걸까요. 머니투데이는 오랜 시간 해법을 고민한 끝에 우리 사회 '성공의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때마침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도 같은 의견을 주셨습니다. 이에 머니투데이와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뜻을 모아 '성공의 기준을 바꾸자'는 캠페인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강지원 변호사를 시작으로 앞으로 꾸준히 인터뷰를 통해 소중한 경험과 의견을 공유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서울 마포구 놀공발전소 사무실에서 피터 리 대표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이기범 기자서울 마포구 놀공발전소 사무실에서 피터 리 대표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이기범 기자


여기 부자(父子)의 성공 스토리가 있다. 아버지는 어릴 때 공부를 잘했고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 CEO까지 올랐다. 아들은 공부에 흥미가 없었고 고교 졸업 후 도망치듯 미국으로 가 좌충우돌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성공의 기준이 △명문 학교 △높은 연봉 △사회적 지위 같은 것이라면 아버지는 성공했고, 아들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성공의 기준을 달리 하면, 즉 △적성찾기 △경제적 자립 △사회적 기여 관점에서 보면 반대로 아버지는 성공하지 못했고, 아들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강원도 봉평면 '허브나라농장'의 원장인 이호순(父)과 놀이교육 전문기업 '놀공발전소'의 대표 피터 리(子)의 얘기다.

머니투데이와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루저없는 사회'를 위해 지난해부터 성공의 기준을 바꾸자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학창시절에는 좋은 학교가 아닌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졸업한 뒤에는 높은 연봉과 사회적 지위를 쫓기보다 경제적 자립과 사회적 기여를 추구하자는 캠페인이다. 성공의 기준만 바꾸면 상위 1%에 속하지 않아도 누구나 성공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삶을 보다 여유롭고 풍요하게 살아갈 수 있다. 시대가 변했으니 성공의 기준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놀공발전소의 '피터 리' 대표(43, 한국이름 이승택)는 이런 캠페인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학창시절 공부는 시원찮았지만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갈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움켜쥐고 놓치지 않았다.

"수원에서 부모님, 여동생, 할아버지와 함께 단독주택에서 살았어요. 초등학교 때까지는 괜찮은 학생이었는데 중학교 때부터 적응을 잘 못했어요. 납득이 돼야만 움직이는 성격인데 우리나라 교육이라는 게 납득이 잘 안 되잖아요. 내성적인 성격에 자신감도 없어서 항상 고민이 많았죠. 학교는 그런 고민에 답해주지 않았고요. 큰 사고를 치진 않았지만 문제아 그룹에 속했던 것 같아요. 술도 일찍 마셨고, 부모님이 밤에 저를 찾으러 돌아다니시기도 하고…."

/사진=이기범 기자/사진=이기범 기자
피터 리 대표의 부모는 모두 서울대를 졸업했다. 아버지 이호순 씨는 졸업 후 삼성그룹에 들어가 CEO 직함까지 달았지만 51세 되던 해 모두 접고 귀농했다. '나이 합 100살이 되면 귀농하자'는 아내와의 약속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아버지 이 씨는 고등학교 시절 농촌운동가를 꿈꿨지만 성적이 너무 좋아 본인 뜻과 달리 농대가 아닌 공대를 가야 했다.(그런 면에서는 아버지는 성공의 기준 제1원칙 '적성찾기'에서 실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쉰 살이 넘어 다시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 성취했으니 완전한 실패로 보기도 어렵다. 시간이 좀 오래 걸렸을 뿐….)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생명과 자연을 사랑한 '엘리트 농부'였다. 마흔 넘어 대학원에 들어갈 정도로 배움에 대한 욕심이 남달랐고, 지금도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일하는 일중독자다.(부부의 귀농 성공스토리는 자서전 여러 권으로도 감당 못할 분량의 이야기라 여기서는 생략한다.)


대기업 사장보다 농사를 좋아한 부모님의 영향이었을까. 피터 리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하란 소리를 듣지 않고 자랐다.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신 적이 별로 없어요. 어릴 때부터 '학원에 갈 필요 없다. 대학도 안 가도 된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라'라고 강조하셨죠. 그래서 문제아이긴 했지만 항상 부모님에 대한 어떤 믿음이 존재했어요. 부모님은 늘 제가 잘 될 거라는 믿음을 심어주셨어요."

피터 리의 여동생은 서울대 미대를 수석 입학할 정도로 수재였지만 피터 리는 만화와 게임에만 몰두한 낙제생이었다. 고3 담임은 그에게 '이 점수로 갈 대학이 없다'고 얘기했고, 그는 우여곡절 끝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집안이 넉넉해서는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삼성이 지금처럼 잘 나가진 않아서 그냥 대기업 홑벌이 집안 수준이었다.) 그리고 반전이 일어났다. 미국에서 낙제생, 낙오생이 아니라 '창의적인 학생'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큰할아버지 친척들이 뉴욕에 계셨어요. 부모님은 어차피 한국에서 적응을 못할 아이란 걸 아셨으니까 보내기로 마음먹으셨고요. 전 유학에 자신이 없어서 고민을 많이 하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토플 점수가 있어야 해서 처음으로 공부를 하고 시험을 봤는데 구체적인 목표가 있어서인지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은 다 떨어졌는데 저만 되더라고요. 참 뿌듯했죠. 미국에 가서는 가장 큰 목표로 삼은 게 '내가 뭘 원하는지를 찾는 것'이었어요. 영어를 하나도 못 했는데 오히려 백지 같은 상태니까 흡수는 더 빠르더라고요. 아버지는 정신연령이 낮아서 빨리 배운 거라고 농담처럼 얘기하셨죠."

그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만큼은 좋아해서 뉴욕의 디자인학교에 들어가 영어와 디자인을 동시에 공부했다.

"학부 최종 전공은 그래픽 디자인 전공이었는데 학교에서 한 시간짜리 2D 애니메이션 수업을 듣고 엄청난 신세계를 발견했어요. 그래서 준비를 더 해서 관련 학과가 있는 학교로 옮겨갔죠. 20대 초반이니까 1992년 정도였는데 인터넷이 보편화되기 전이었어요. C언어, 프로그래밍 같은 걸 공부하고 디자인도 같이 팠어요. 어느새 제 모습이 장학금을 받는 모범생으로 바뀌어 있더군요. 첫 눈에 반한 친구를 만나 결혼도 했고요."

/사진=이기범 기자/사진=이기범 기자
첫 직장은 유력 시사주간지 '타임'이었다. 인터넷을 남들보다 빨리 공부한 덕에 '타임스 닷컴'이 처음 생길 때 기회를 잡았다. 마침 IT 붐이 일기도 한 시점이었다.

"기자는 아니었지만 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미디어 매체가 돌아가는 과정을 봤던 것이 도움이 됐어요. 근무조건도 좋았고 다 좋았는데 이상하게 제 스스로는 안 채워지는 뭔가가 있었어요. 그게 뭘까 하고 항상 생각했지만 깨닫지는 못했죠. 그러면 '돈'인가 싶어서 뉴저지의 제약회사로 간 적도 있어요. 거기서 '돈은 더 아니구나'란 걸 깨달았죠."

전환점은 뉴욕대 대학원에서 찾아왔다. 광고인 박웅현을 만난 것.

"당시 교수님이 전설 같은 분이셨는데 컴퓨터 수업임에도 '우리는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충격적인 얘기였어요. 100명 정도가 수업을 들었는데 변호사, 댄서 등 온갖 분야의 사람이 다 있는 거예요. 그 때 협업의 가치를 배웠죠. 박웅현 선배도 회사가 보내주는 유학 기회를 잡고 와서 같이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제가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어디서 뭘 하든지 현재에 충실하라고 강조하셨죠. 지식은 최소 나이 40은 넘어야 나오는 거라고. 당시의 저는 빨리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는데 그 얘기가 전환점이 됐어요.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공부만 할 게 아니라 세상을 만나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거죠."

이후 피터 리는 대학원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게임을 만들어 여러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쾌거를 거둔다. 게임 판권을 판 돈으로 뉴욕 맨해튼에 게임 회사까지 설립했다. CEO가 된 것이다.

"대학원에서 게임 디자인, 이론 수업을 들으면서 신세계를 발견했어요. 그 전까지는 게임을 3~4시간씩 하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는데 게임이 단순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또 하나의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순간적으로 게임이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임은 재미가 없으면 아무 기능을 못해요. 재미가 존재의 이유인 거죠. 이런 생각들이 게임을 직접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연결이 됐고, 창업으로까지 이어졌죠. 저희 회사에서 만든 게임이 히트를 치면서 미국 캐주얼 게임 시장에서 1위를 한 적이 있어요. 2005년에 만든 게임이 대박이 나면서 톱 회사가 됐죠."

하지만 회사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피터 리의 가슴에는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여전히 존재했다. 회사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2005년부터 '빅게임 페스티벌'을 진행했다. 타임스퀘어 같은 넓은 공간에서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여 놀이를 펼쳤는데, '플래시 몹'의 모태 같은 행사였다. 페스티벌은 샌프란시스코 등 다른 대도시로 퍼져나갔다. 빌게이츠재단, 맥아더재단 등의 후원을 받아 뉴욕시에 공립학교를 설립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보통의 학교가 아닌 게임이 중심이 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학교였다.

"제가 학창시절에 학교에 적응을 잘 못했잖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가고 싶은 학교를 만들고 싶었어요. 학교를 준비하면서 정말 다양한 전문가들과 많은 협업을 했어요. 그 결과 이 실험적인 학교에 모집 첫해 3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왔어요. 부모님의 표정을 보면서 심장이 쿵쿵 뛰는 걸 경험했어요. '이거다' 싶었죠.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을 드디어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진=이기범 기자/사진=이기범 기자
그는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을 결심한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가슴 뛰는 일'을 위해 '놀공발전소(www.nolgong.com)'를 설립했다.

"요즘 학생들을 만나면서 느낀 게 '사회성이 정말 없구나' 하는 거예요. 학생회장 같은, 말을 또박또박 하긴 하는데 듣다보면 '이건 네 생각이 아닌데' 싶어요. 그렇다고 아이들이 대안을 갖고 있지도 않죠. 한국 사회는 대안이 너무나 부족해요. 학교도 대안이 될 수 없고요. 입시를 바꾸는 건 구조적인 문제이고…. 오히려 '성공의 기준을 바꾸자' 이런 캠페인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 공부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뭘 원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나가는 것'에 놀이가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피터 리 대표는 믿는다.

"게임을 할 때는 사람들마다 성격이 나와요. 게임은 사람을 수평적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나이든 사람들도 그 동안 갖고 있던 사회적인 틀을 깨고 나를 보여주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공감하거나 사람을 알아가게 되죠. 프로그램을 진행해 보면 특성화고 아이들은 협업을 잘 하는 편인데 오히려 인문계고 아이들은 경쟁에 익숙해서인지 며칠을 함께 해도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고 협업도 못하더라고요. 학교가 사회성, 표현력, 공감능력 등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거죠."

놀이를 통해 사회성, 표현력, 공감능력 등을 기르고 '해방 상태'를 경험하게 되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스스로 놀 수 있는 아이들로 바뀌게 된다. 스스로 놀 수 있게 되면 '내가 뭘 좋아하지?'라는 질문에도 스스로 답을 찾아나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 피터 리 대표의 생각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감정적이든, 육체적이든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지불을 해야 하죠. 지금 정말 힘든 상태라면 뭔가를 위해 지불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힘들 때 '왜 힘들지?'라고 생각하면 더 힘들어져요. 그냥 '내가 뭔가를 지불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죠. 내 에너지를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 에너지를 소모적으로 쓰지 않고 생산적으로 써야 해요. 취향도 가질 필요가 있어요. 남들이 보기에 좋은 것일 필요는 없어요. 구체적으로 스스로 원하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해결돼 나간다고 생각해요."

◆놀공발전소는…
'놀이와 게임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모토로 2010년 설립됐다. 회사에서 '노력'은 절대 금물이다. 각자 가장 잘 할 수 있는 업무를 찾아 마음껏 즐기면서 일하면 된다. 피터 리 대표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 '노력금지'라는 책까지 펴냈다. 사무실에는 만화책, 피규어, 장난감 등이 가득 들어차 있다. 대리, 과장 같은 직책이 없고 직원들은 서로를 '공'으로 부른다. 이를테면 대표 호칭은 '피터 공'이다. 수평적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방책이다. 놀공발전소는 게임의 개념을 현실화해 영감을 줄 수 있는 오프라인 프로그램을 기획·제작한다. 지금까지 현대자동차, 독일문화원, 금융감독원, 유니세프, KAIST 등 유수의 기업 및 기관과 함께 협업해 왔다. 최근에는 독일문화원과 협업해 '파우스트 되기'라는 게임을 개발해 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놀이와 게임을 통해 상위 1%가 독식하는 세상이 아닌, 승자와 패자가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입사에 유리하다.

(대담 : 최중혁 사회부 교육팀장, 사진 : 이기범 기자, 정리 : 조영선 모두다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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