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 논란' 크레용팝과 타이레놀의 차이

머니투데이 이상배 기자 2013.08.26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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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인사이트] 타이레놀 3000만통 리콜한 존슨앤존슨, 소비자 믿음 얻어··· 크레용팝, 더 신속 과감히 대응했어야

'일베 논란' 크레용팝과 타이레놀의 차이


1982년 9월 미국 시카고 등에서 7명이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부검 결과, 이들의 몸 속에서 청산가리가 검출됐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먹은 것은 단 한가지. 바로 '타이레놀'이었다. 이후 미국 전역에서 약 250명이 타이레놀을 먹은 뒤 고통을 호소했다.

당시 타이레놀은 미국 대부분의 가정이 한통씩은 갖고 있을 정도의 '국민 상비약'이었다. 미국 해열진통제 시장 내 점유율은 37%에 달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벌어진 뒤 점유율은 7%로 급전직하했다.



그러나 경찰 조사 결과, 타이레놀 제조공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한 소매업자가 일부 타이레놀의 캡슐에 청산가리를 주입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레놀 제조사인 존슨앤존슨(J&J)는 신속하면서도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미국 전역에서 판매되고 있던 타이레놀 3100만통을 일제히 회수(리콜)했다. 회수 비용으로만 100만달러가 들었다. 타이레놀에 대한 광고를 즉각 중단하고, 캡슐 형태의 타이레놀 판매를 영구 중단했다.



존슨앤존슨은 이후 타이레놀의 포장 용기도 처음부터 다시 설계했다. 누군가 이물질을 넣기 위해 한번 개봉하면 누구라도 이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병입구를 3겹의 막으로 씌웠다.

사태가 진정되자 존슨앤존슨은 타이레놀을 회수했던 가정에 무료로 다시 제품을 제공했다. 존슨앤존슨이 보여준 적극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모습에 사람들은 다시 타이레놀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존슨앤존슨이 잃어버렸던 시장을 회복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5개월. 타이레놀 연간 판매액은 다시 4억달러 수준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 이후 존슨앤존슨과 타이레놀에 대한 시장의 신뢰는 더욱 굳건해졌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렇게 전했다. "존슨앤존슨은 스스로 엄청난 손실을 감당하면서까지 신속하고 확실한 조치를 취했다. 만약 그들이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사건의 파장은 엄청났을 것이다"


이는 자사 상품이 문제에 휘말렸을 때 기업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전범'(Best Practice)이다. 신속하고 과감하게 대응해 믿음을 회복하라는 것. 대부분의 미국 기업들이 이를 '모범사례'로 삼아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 두고 있다.

그 반대 사례가 일본 유키지루시 유업이다. 일본 1위 우유업체였던 유키지루시는 2000년 자사 우유를 먹은 어린이들이 집단 식중독을 일으켰음에도 끝까지 나 몰라라했고,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

최근 극우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 관련 논란에 휘말린 걸그룹 '크레용팝'의 소속사가 보여준 대응은 둘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8월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CJ E&M센터에서 열린 생방송 Mnet '엠카운트다운'에 출연한 걸그룹 크레용팝/사진=최부석 기자8월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CJ E&M센터에서 열린 생방송 Mnet '엠카운트다운'에 출연한 걸그룹 크레용팝/사진=최부석 기자
크레용팝이 일베와 관련돼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은 지난 6월22일. 한 멤버가 "오늘 여러분 '노무노무' 멋졌던 거 알죠?"라는 글을 올리면서였다. '노무노무'는 일베 회원들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희화화하기 위해 '너무너무'의 대체어로 사용하는 은어다.

이어 7월에는 크레용팝의 한 멤버가 다리에 쥐가 났는지 다리를 절며 나타나자 화면 밖에 있던 한 멤버가 "쩔뚝이 아니에요?"라고 하는 장면이 방송을 탔다. '쩔뚝이'는 과거 고문과 교통사고 등으로 다리를 절게 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용어로 일베에서 범용된다.

당시 크레용팝의 소속사인 크롬엔터테인먼트는 홈페이지를 통해 "시장 정보를 얻기 위해 일베에 들른 것일 뿐 정치적 성향이 있어 간 것이 아니다"라며 소극적으로 해명하는 선에 그쳤다. 마침 한 멤버가 해명한다며 올린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엔 부처만 보인다'는 뜻의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의'(豕眼見惟豕, 佛眼見惟佛矣)라는 글은 오히려 논란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결국 문제가 터진 것은 지난 19일 인터넷 쇼핑몰 옥션이 크레용팝을 모델로 기용하면서다. 일부 누리꾼들은 "일베 회원인 크레용팝을 기용한 옥션 역시 일베나 마찬가지"라며 옥션에 대한 불매 및 탈퇴 운동을 전개했다.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옥션은 결국 크레팝용이 출연한 광고의 노출빈도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광고를 중단했다.

또 같은 날 삼성전자도 페이스북에 크레용팝으로 보이는 5인조 그룹의 실루엣을 담은 '2013 딜라이트 어반그라운드'(2013 d'light urbanground) 콘서트 광고를 올린 뒤 누리꾼들로부터 노도와 같은 반발에 직면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크레용팝의 콘서트 출연을 고려하고 있었을 뿐 결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야 크레용팝 소속사는 21일 공식 홈페이지에서 "지금의 논란처럼 특정 정치성향, 반사회적, 반인륜적 글과 댓글이 올라오는 사이트임을 인지하고 접속한 것이 절대 아니다"라며 '일베'와 명확히 선을 긋고 적극 해명했다.

이번 해명은 더 넓은 시장을 위해 국내 최대 유머 사이트의 수십만 회원이라는 충성도 높은 고객군을 포기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베는 동시접속자 2만여명, 주간 접속자 약 40만명으로 지난달 유머 사이트 분야 점유율이 56%에 달했다.

크레용팝의 소속사가 잘한 일이라면 늦었지만 기존 고객군 이탈이라는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대의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잘못한 일이라면 보다 신속하고 과감하게 일베와 선을 긋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존슨앤존슨처럼 크레용팝에게도 이번 일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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