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생활 천재' 안철수, 매일 밤낮으로…

머니투데이 김성휘 기자 2012.09.19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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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백신개발자, CEO, 대학교수…공익성·자기헌신으로 명망

"고교시절 야구장에 강제로 응원을 따라갔는데 상대편 투수가 최동원 선수였어요. 그때 최동원 선수가 공을 너무 잘 던져서, 잘 던지면 야유하고 실투하면 좋아서 박수치고 그랬어요." (안철수, 5월30일 부산대 강연)

수줍음이 많아 학교의 야구 응원에도 마지못해 참여했다. 중간 성적에 책읽기만 좋아했다. 그런 고등학생이 30여년 뒤 교과서에 실리는 인물이 된 것도 모자라 유력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대선출마 여부를 두고 1년 가까이 온 나라를 뒤흔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다.



안 원장은 의사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변신, 백신 개발자, 벤처기업 경영자로 승승장구하다 유학을 떠나 대학 교수가 되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등 다방면에 왕성한 활동과 능력을 보여 왔다.

삶의 궤적에서 보여준 성실함, 공익을 중시하는 가치관, 어떤 분야를 맡아도 성과를 내는 탁월한 능력, 자기헌신 등은 그를 후배 세대의 '롤모델'로 만들었다. 마침내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기존 정치권에 실망한 많은 유권자들은 그를 대통령감으로 '호출'하기에 이른다.



'이중생활 천재' 안철수, 매일 밤낮으로…


안 원장은 1962년 2월 26일 부산에서 태어나 198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동 대학원에서 의학 석·박사 학위를 얻었다. 의대 재학 중이던 1982년 가을 컴퓨터를 처음 접했고 이후 컴퓨터에 관심을 가지면서 국내 최초의 백신 프로그램인 'V3'를 개발했다.

1990년 당시 최연소인 만 27세에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학과장을 맡았다. 그로부터 7년간 낮에는 의사 생활을, 새벽에는 백신 개발을 하는 '이중생활'을 했다.

안 원장에 따르면 "교수가 학생 몰래 다른 일을 하면 학생은 불행한 것"이라는 생각에 학과장을 그만두고 1995년 2월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한다. 2005년 3월까지 안철수연구소의 대표이사로 일하며 '컴퓨터 고치는 의사'로 명성을 얻는다.


최고경영자(CEO)에서 스스로 물러난 그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스쿨에서 MBA를 취득, 국내로 돌아와 KAIST 석좌교수에 임용됐다. 2011년에는 모교인 서울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차세대융합기술원장을 맡았다. 차세대융합기술원장직은 2011년 10월 28일 사임했다.

2009년 6월 TV프로그램 '무릎팍도사' 출연 뒤 대중적 인기가 급상승했으며 2011년엔 그와 '소울 메이트'로 통하는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과 함께 전국을 다니며 '청춘콘서트'를 열어 젊은이들을 위로했다. 이때부터 안 원장은 정치적 인물이 됐다.

안 원장은 그해 가을 무상급식 논란의 끝에 사임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공석을 채우기 위한 보궐선거에 출마 의사를 내비쳤고 자신보다 지지율이 낮던 박원순 변호사에게 후보 자리를 전격 양보하는 이른바 '아름다운 단일화'의 주인공이 됐다. 이 같은 양보는 안 원장의 정치적 주가를 오히려 높여줬고 그는 대선주자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올 초부터 그의 대선출마를 기정사실로 보는 보도가 쏟아졌고 그는 대선주자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1~2위를 다투는 유력인사가 됐다. 그의 등장으로 정치, 사회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안철수 현상 또는 안철수 신드롬으로 불렸다.

그는 침묵을 지켜오다 4.11 총선 이후 대선 출마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7월에 자신의 정책공약집으로 평가받는 '안철수의 생각'을 출간했고 며칠 뒤 'SBS 힐링캠프'에 나와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나의 생각에 대해 동의한다면 (대선 출마를) 고려해볼 수 있다"고 한층 진전된 언급을 했다.

그 이후엔 전국 각지를 다니며 각계각층 국민을 만나고 학자와 원로, 전문가들도 두루 만나는 등 사실상의 대선행보를 펼쳤다.

안 원장은 마침내 지난 11일 "민주당 대선후보가 결정된 뒤 입장을 밝히겠다"고 예고했고 19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생각과 결심을 밝히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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