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 건너편 겸암정사와 옥연정사 사이에는 '층길'로 불리는 오솔길이 범인의 통행을 쉬 허락하지 않고 숨어 있다. 부용대 절벽 한가운데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좁은 벼룻길이다.
태백 황지에서 실핏줄처럼 시작한 낙동강. 개울을 이루고 계곡을 조각하고 700리를 굽이굽이 흘러가는 동안 숱한 풍경을 만들어 냈다. 그중에서도 산과 강이 S자 모양으로 어우러져 태극 모양을 그려낸 '산태극(山太極)·수태극(水太極)'의 하회마을은 가장 빼어난 풍경으로 치는 곳이다.
물에 뜬 연꽃 형상의 명당이라고 해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으로 불리는 하회마을 전경.
처음 방문한 사람은 겸암정사의 자태와 풍경에 먼저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강 건너 하회마을과 멋드러진 만송정 송림이 누마루 기둥 그 자체로 액자가 돼 한눈에 들어온다. 누구나 감탄사를 연발할 게 틀림없다.
고서에 묻혀 학문에 취하고 누마루 위에서 자연을 음미하며 때로는 풍류를 논했던 선비의 삶의 흔적, 그리고 멋의 자취를 쫒을 수 있다.
겸암정사의 누마루에 서면 마치 영화 속 '전우치'처럼 고화 속으로 빨려 들어간 풍경이 된다. 난간에 기대앉아 반나절쯤은 허비한다고 해도 조금도 아깝지 않으리라. 잠시나마 느긋하게 이곳을 독차지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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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특유의 기품과 그림 같은 풍경에 한동안 눈으로 호사를 하고 옥연정사로 향한다. 겸암정사와 옥연정사 사이에는 '층길'로 불리는 오솔길이 범인의 통행을 쉬 허락하지 않고 숨어 있다. 부용대 절벽 한가운데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좁은 벼룻길이다.
옥연정사 앞 소나무 그늘. 건너편 솔숲이 만송정이다.
옥연정사에 기거하던 조선의 명재상 서애 류성룡은 겸암정사에 머물던 형, 겸암 류운룡을 만나기 위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이 길을 걸어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해설사 박 씨는 형과 아우가 나란히 이곳에서 담력 훈련을 했다는 설명을 곁들인다.
잠깐의 시간 동안 수백 년 차곡차곡 쌓아올린 이야기를 다 들을 수야 없겠지만, 그곳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그대로 역사 속 한 장면이 되고 옛날이야기처럼 귀에 쏙쏙 박힌다.
길 위에 형제의 우애가 펼쳐지고 그 시간 속으로 길이 이어진다. 눈앞에 걸어야 할 길과 만나야 할 사색의 시간들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여행자는 충분히 행복하다. 길(道) 위의 사색(思索), 줄이니 '도사(道思)'일세.
◇450년 시간이 멈춘 '층길'에선 옛 이야기 소곤소곤
치렁치렁 쏟아지는 늦여름 햇살 속을 천천히 걸어간다. 늦더위에 숨이 턱턱 막힌다. 익은 햇살이 아무나 이를 수 없었던 형제의 길을 내리쬔다. 발아래는 푸른 낙동강이 여행자와 같은 템포로 느릿느릿 걸으면서 도반(道伴)을 자청한다. 그리고 쉼 없이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해가 바뀌고 세월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도 여전히 변하지 않을 옛길. 그 길에서 이름 모를 야생화를 만나고 강을 만나고 하회마을과 숲과 새를 만난다. 벼랑에는 600년 됐다는 대추나무가 엄지 손톱만한 열매를 매달고 고개를 빼죽 내민다.
"하나 따 먹어 볼까?"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제 나름 자라 외모는 볼품없지만 맛은 기대 이상이다. 형제가 다녔던 옛길의 거리는 불과 200M 남짓한데 좁은 폭이 딱 '1인용'인 것이, 그야말로 험준해 옥연정사까지 닿는데 30분이나 걸렸다.
서애와 겸암 형제가 다녔던 옛길의 거리는 불과 200M 남짓한데 좁은 폭이 딱 '1인용'이다.
야생화가 자라고 있는 작은 마당, 뒷산 부용대로 이어지는 오솔길, 집 뒤편에서 몰래몰래 자라는 이끼까지 이 집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조용히 존재를 알린다. 앞마당에는 서애가 직접 심었다는 늘씬한 노송 한 그루가 450년 동안 인적 드문 옥연정사를 지키고 있다.
'대나무 숲을 바라보는 문'이라는 '간죽문(看竹門)'을 나와 옥연정사 뒷산 오솔길을 따라 부용대에 오른다. 날씬하게 휘돌아 나가는 낙동강 물길과 뽀얀 모래밭, 기세등등한 청량산, 깎아지른 절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 소리가 절로 나온다. 산과 나무와 물과 하늘이 온전히 제 자리에 있는 것인데도 이렇게 조화로울 수 있다니. 자연을 아프게 하거나 거스르지 않고 어찌 저렇듯 꼭 맞는 옷처럼 아늑한 자리에다 터전을 들여놓았을까.
부용대
하회마을의 매력은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흙 담의 정취가 좋다. 반듯하게 깎은 돌이 아니라 강이나 밭가에 구르던 돌을 그대로 쌓아 올린 게 보기 좋다. 세월 따라 켜켜이 쌓아올려진 돌담과 그 길을 따라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시간여행이다.
여름 행락객이 지나쳐간 마을은 고즈넉하고 인기척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풍산 류씨의 대종가인 '입암고택' '충효당' '주일재' '남촌댁' '북촌댁' '작천고택' '하동고택' 등 이름난 고택만 꼽아도 여럿이다. 이틀만 비워도 금세 빈집 티가 나는 고택은 현대식 주택보다 손길이 몇 배는 더 필요할 터인데 사람 냄새 안 나는 집이 없다.
풍산 류씨의 대종가인 '입암고택'. '양진당'으로도 불린다.
△먹을거리
지형적으로 산이 많고 논보다 밭이 많은 안동에는 한국 고유의 맛이 오롯이 담겨있는 전통음식이 많다. 유림의 정신이 살아있는 헛제사밥은 제상에 올렸던 나물과 탕채를 밥과 함께 큰 사발에 넣고 비벼먹는 음식이다.
명태·육류·산적과 같은 전과 조기·두부·쇠고기 적·돔배기 등이 제기접시에 올려 나온다. 안동시내에서 멀지 않은 국내 최대의 목조다리 월영교 맞은편에 있는 까치구멍집(054-855-1056)이 유명하다.
반가에서 손님 접대에 올렸다던 건진국수도 별미다. 칼국수와 비슷한데 밀가루와 콩가루로 만든 국수에 육수를 넣고 볶은 애호박이나 채소·지단을 고명으로 얹어먹는 안동의 향토음식이다. 안동국시(054-852-9799). 구 시장에는 안동의 별미인 찜닭골목이 있다.
△주변 가볼만한 곳
일정에 여유가 있다면 고택도 많고 명소도 많은 안동의 풍부한 문화자산을 체험해 보시라. 안동은 유림의 고장답게 퇴계 이황을 향사하는 도산서원을 비롯해 고산서원·병산서원·호계서원 등의 서원이 유독 많다.
안동포마을과 안동포전시관(054-840-5314)에서는 삼베 실을 뽑아내는 과정, 여전히 옛 베틀로 한 땀 한 땀 안동포를 정성스레 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 최초의 고택 체험시설인 지례예술촌(054-852-1913)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그림이다. 안동시 법흥동에 위치한 조선 중기 전통가옥 임청각(054-853-3455)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시대의 전탑(벽돌탑)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