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개성사건과 서해북방한계선

머니투데이 류병운 홍익대 법대 교수 2010.12.1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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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시평]개성사건과 서해북방한계선


1951년 6월 유엔군 측은 '개성사건'이라는 결정적 실수를 범한다. 당시 개성 일부를 유엔군 기계화부대가 점령하고 있었는데 휴전회담이 열리는 개성을 중립지역으로 하자는 공산군 측 제안을 유엔군 측이 성급하게 수용, 그 부대를 뒤로 물러나게 한 것이다. 유엔군이 물러나자마자 그 지역은 공산군에게 기습 점령당한다. 유엔군 측이 거듭 항의했지만 북한은 이러한 기망(欺罔)적 점령을 마치 군사적 탈환으로 선전하며 그 반환을 거부했다. 몇달의 승강이 끝에 결국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기게 된다.

이러한 역사의 과오를 통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폭격을 바라보면 많은 것이 보인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채택한 10·4공동선언은 서해에서 우발적 충돌방지를 위한 공동어로수역 설정과 향후 회담을 통해 이 수역을 평화수역으로 전환한다는 것, 서해북방한계선(NLL) 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지대 설치, 해주직항로, 한강하구 공동이용 추진 등에 합의했다. 요컨대 NLL을 무효화하려는 북한의 의도에 맞장구를 쳐준 것이다.



사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훨씬 전부터 당시 노무현 정권은 한강하구를 준설해 서울 입구까지 제법 큰 배가 들어오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언론에 흘렸다. 야당 후보였던 이명박 대통령의 대운하 공약에 대해서는 매우 냉소적이었던 그들이 말이다.

한강하구에서 시작해 강화, 교동도 북쪽으로 NLL이 그어져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NLL 조정을 염두에 두고 '봄부터 소쩍새'가 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그보다 훨씬 전부터 좌파 소쩍새들은 남북 어민들이 공동으로 평화롭게 꽃게를 잡게 하자며 계속 울어댔다.



6·25전쟁 중 북한은 이렇다할 만한 해군이 없었던 까닭에 38선 이북의 대부분 해역은 유엔군의 작전권에 속해 있었다. 휴전 이후 유엔군이 NLL 이남으로 물러나자 북한은 그 북쪽 수역을 거저 얻게 된다. 그후 1973년 북한이 처음 이의를 제기할 때까지 남북한은 20여년 동안 일관되게 NLL을 존중해왔다.

이와 같은 '일관되고 계속적인 국가 관행(practice)'은 국제관습법의 성립요소다. 단지 두 나라 사이에서도 지역 국제관습법은 성립될 수 있다. 즉, NLL은 국제관습법으로 굳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도 남북한은 향후 새 해상경계선을 확정할 때까지 현 NLL 준수에 합의한 바 있다.

서해 5도와 황해도 사이의 중간선인 NLL은 '마주보는 국가의 영해 경계선을 중간선으로 할 수 있다'는 1982년 유엔해양법 협약 규정에는 일단 부합한다. 물론 남북한이 평화로운 일반적 국제관계라면 유엔해양법의 기준대로 북한 해안에 대해 좀더 개방적인 경계선으로 NLL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연평도 폭격에서 보듯 서해 NLL은 육상의 휴전선처럼 군사적 스파크를 막는 해상 군사분계선이다.


그런데 안팎의 불순한 무리는 여전히 이 NLL을 흔들어댄다. 국내 종북주의자들은 NLL을 유엔군사령부가 일방적으로 그었다는 점을 클로즈업하며 서해에서 평화적 꽃게잡이를 주장한다. 아예 NLL을 남쪽으로 내려 다시 긋자는 칼럼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셀릭 해리슨(Selig Harrison) 같은 나라 밖 친북주의자도 있다.

정부는 우리 젊은 피로 지킨 NLL을 빈틈없이 사수해야 한다. '개성사건'의 교훈을 절대로 잊어서도, 꽃게와 안보를 바꾸려는 주장에 현혹되어서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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