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핏과 멍거, 라응찬과 신상훈

머니투데이 김준형 증권부장 2010.09.07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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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의 돈으로 본 세상]

지난해 미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열린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 때의 일이다.

주총 이후 관례대로 외국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별도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질의 응답이 끝나고 다들 일어서려는데 유럽계로 보이는 한 기자가 지폐 한 장과 볼펜을 워런 버핏 회장에게 쑥 내밀었다. 버핏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폐에 서명을 해줬다.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하고 머뭇거리던 다른 외국기자들이 기념품 혹은 '부적(?)'으로 삼겠다는 생각에서인지 우르르 지폐를 내밀었다. 다들 버핏한테 몰리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찰리 멍거 부회장이 머쓱해졌다.



'사인회'가 거의 끝날 때쯤 그제야 발견했다는 듯 누군가가 멍거에게도 지폐를 내밀었다. 버핏 사인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군말없이 지폐에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기자로서 해도 괜찮은 일인지 잠시 갈등하다가 나도 주머니에 구겨져 있던 20달러 지폐에 두 사람의 사인을 받았다. 개중에 깨끗한 건 버핏 몫이었다. 지금은 버핏의 돈이 어디 쳐박혀 있는지 모르겠다. '2인자 멍거'의 지폐는 말할 것도 없다).

↑ 2009년 미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열린 주주총회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지폐에 서명해주고 있는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왼쪽)과 찰리 멍거 부회장.[사진=김준형 기자]↑ 2009년 미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열린 주주총회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지폐에 서명해주고 있는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왼쪽)과 찰리 멍거 부회장.[사진=김준형 기자]


한국 나이로 버핏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여든 일곱,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 변호사. 30대 중반 부동산 투자프로젝트로 백만장자 대열에 합류, 포브스지 표지모델, 투자회사 웨스코파이낸셜 대표...요컨대 남이 사인하는 걸 옆에서 뻘쭘하게 쳐다보고만 있을 군번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실제로 버크셔 해서웨이 주총 2주 뒤쯤 캘리포니아에서 열리는 웨스코의 주총에서 그가 단독으로 진행하는 일문일답은 버핏 못지 않게 인기가 있다.



멍거는 근 반세기 전인 1959년 서른 다섯에 버핏을 처음 만났다. 버크셔 해서웨이에 합류, 그와 공식적으로 인연을 맺은 이후 2인자 자리만 35년째이다.

'오마하의 현인' '투자의 전설' 버핏을 모시고 있는 탓에 늘 2인자에 머물러 있지만 능력이나 인품 면에서 버핏보다 더 쳐주는 사람들도 있다. 능력뿐 아니라 '35년 2인자'가 가능했던 노하우도 있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공식석상에서도 버핏이 마이크를 넘겨주면 그때서야 몇 마디 툭 하고 던지는 식이다.

버핏은 그를 2인자가 아닌 동지이자 친구로 대했다.
주총 같은 자리에서도 늘 나란히 앉는다. "중요한 투자결정은 다 멍거의 아이디어"라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한다.


우리 금융권에서는 30년을 한 지붕 아래서 살아온 1인자와 2인자의 결별이 초미의 관심사이다. '결별'이라기 보다는 '검찰고발'이라는 칼을 빌어 1인자가 2인자를 벼랑끝으로 몰고 갔다. 백척간두에서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양상이다.
범죄가 있었다면 옹호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금융권의 이건희'라고까지 불리던 막강한 1인자가 내부고발자(휘슬블로어)처럼 2인자를 내친 모습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정도 되면 1,2인자, 혹은 3인자까지 포함된 몇몇 사람의 권력다툼 문제가 아니라 기업 지배구조 자체의 붕괴 차원이다. 라응찬회장이나 신상훈 사장은 각각 신한지주 지분 0.04%, 0.03%에 불과한 전문 경영인이다.

세간에서는 권력다툼이 관련돼 있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주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경영진이 주주의 이익보다는 자기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른바 '대리인문제(Agent Problem)'가 극에 달한 것이다.
더구나 신한지주 (49,000원 ▲1,300 +2.73%)는 상장기업이다. 재일교포를 포함한 주요주주는 물론이거니와, 지배구조를 믿고 투자한 소액주주들도 황당할 노릇이다. 주가가 계속 뒷걸음치는 것은 당연하다.

얼마전 만난 한 중소기업 사장과 상무가 생각난다. 대학 1,2년 선후배인 이들은 군대 제대 직후에 만나 20여년간 기업을 일궜다.
이제 코스닥 상장을 위해 뛰고 있다. 사장보다 상무가 나이가 두 살 많지만 자기가 살던 아파트를 헐값에 넘겨줄 정도로 '동지'로 지내고 있다. 이들도 십몇 년 지나면 라-신 커플 모양이 될지 모르지만, 1인자와 2인자가 힘을 합치는 동안에는 상장후에도 회사나 주가가 잘 나갈 것 같다는 생각이다.

여든과 아흔을 바라보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버핏과 멍거, '노욕'이 넘치고 넘칠 나이인 이 사람들은 30년 넘게 세계 최고 투자회사를 꾸리고 있다.
거기 비하면 한참 작고 초라한 부와 권력을 놓고 '노욕' 소리를 들어가며 다퉈야 할까.
우리나라의 1, 2인자들, 특히 많은 주주들의 이해를 짊어지고 있는 상장사 넘버 1,2분들께 묻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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