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의 자본가여 단결하라

머니투데이 김준형 증권부장 2010.08.17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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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의 돈으로 본 세상]

증권업계 젊은 경영자(CEO)급 인사들의 모임에서 사람이 평생 물리적으로 쓸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될 것인가가 화제에 올랐다. 대략 한 300억원 정도가 한계라는데 의견이 모아지더라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매일 하루에 100만원씩 쓰고, 가끔씩 해외여행 같은데 몫돈을 쓴다 해도 1년에 순수하게 자기 손으로 5억원 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40년 정도 그렇게 왕성하게 쓰기만 해도 200억원. 아이들 한명 가르치고 시집장가 보내는데 30억원 정도 쓴다고 치자. 할아버지의 재력이 아이들 교육의 필수 조건이라니 손자들 교육시키는데도 한 10억원씩 쓰자고 치자. 이렇게 써야 '겨우' 300억원을 소진할 수 있다.



자신이 '사용가치'를 누릴 수 있는 돈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장부상에 존재하는 '수치'나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이런 '추상적이면서도 천문학적인 부(富)'를 지닌 사람들이 '널려 있다.
봉건주의 자본가계급이 탄생한 이래 상업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도 농사짓고, 장사하고, 물건 만들어서 거부가 되는데는 수십년 혹은 몇 대가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금융자본주의가 만개하면서 상대적으로 훨씬 짧은 기간에 자본시장을 활용해 억만장자들이 탄생했고, 이 시각에도 급속도로 늘고 있다.

포브스지가 올 연초에 발표한 자산 10억달러(1조2000억원) 이상 억만장자 수는 793명에 달한다. 한국에도 이건희·정몽구·이명희회장과 정몽준 의원등 4명이 포함돼 있다. 금융위기로 이만큼 줄어들었지만 작년 재작년엔 1000명이 넘었다. 1986년에는 불과 140명이었으니 증가속도가 대단하다. 이들의 총 자산은 시장 상황에 따라 2조~4조달러를 오간다.



부호 순위 1,2위에 올라 있는 '왕부호'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과 워런 버핏 벅셔 해서웨이 회장이 수십명의 억만장자들에게 1500억달러에 달하는 '기부 서약'을 이끌어냈다. 게이츠와 버핏은 포브스지의 억만장자 명단에 오른 거부들에게 기부서약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게이츠와 버핏의 스승은 철강왕 카네기이다.
버핏은 게이츠가 설립한 재단에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기에 앞서 카네기가 쓴 '부(wealth)'라는 에세이를 선물했다.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수치'라고 여기던 카네기는 '능동적 기부자'의 삶을 살았다.
세계의 부호들에게 적극적인 자선에 나설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써서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조국인 미국같은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1898년 필리핀에 2000만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게이츠와 버핏이 그들의 자선재단 규모가 여전히 너무 작다고 말하는 것은 카네기가 꿈꿨던 '능동적 역할'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선재단의 비교대상이나 '경쟁상대'도 다른 재단이 아니라 개별 국가의 정부이다.


억만장자들의 자선 방식을 정리한 '박애 자본주의(Philanthro-Capitalism)'이라는 책을 엮은 매튜 비숍은 "돈을 버는데 가장 능력을 발휘했던 부호들이야말로 돈을 쓰는데도 가장 효율적으로 쓸수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금융권이나 자본시장을 이용해 돈을 번 21세기 거부들은 '레버리지'를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부자의 돈을 빈자에게 나눠주려는 이들은 빛바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것일까.

급팽창하고 있는 세계의 거부들이 끝없이 탐욕을 채우려 한다면, 그들을 있게 한 자본주의 질서는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게 이들 생각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자선을 단지 '여가생활'이 아닌 중요한 '비즈니스'로 삼고 세계 자본가들의 연대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162년전 마르크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만국의 자본가들이 일으키는 '혁명'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그 대열에 합류하는 '혁명가'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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