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면칼럼]패자를 위하여

머니투데이 박종면 더벨 대표 2010.07.05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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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총을 겨누지는 않지만 전쟁과 가장 비슷한 것을 고르라면 무엇을 들겠는가. 우선 정치가 있다. 스포츠도 전쟁과 유사하다. 특히 축구가 그렇다. 세종시 같은 정치전쟁도 있지만 월드컵 축구도 전쟁이더라.
 
정치나 축구가 전쟁에 가깝다는 것은 승패에 대한 집착이 크다는 뜻이고, 승자와 패자간 희비가 극명히 엇갈린다는 의미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팀은 당초 목표한 16강에 진출함으로써 승자의 대열에 들었다. 그러나 결정적 득점기회를 놓친 이동국 염기훈 선수나 페널티킥을 내준 김남일 선수는 스스로를 승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행이 아닌 러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김남일 선수도 안타깝지만 16강 기념 환영행사 내내 굳은 표정이던 이동국 염기훈 선수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짠하다.
 
'세종시 전쟁'도 '월드컵 전쟁'만큼이나 승자와 패자 간에 희비가 엇갈린다. 세종시 전쟁의 승자는 야당이 아니라 박근혜 전 대표다. 패자는 이명박 대통령과 정운찬 총리다. 박근혜 전 대표는 국민과 약속을 지킨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확실히 각인시켰을 뿐 아니라 충청권에서 입지를 더욱 다졌다. 이제는 그를 총리로 추대하자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이명박 대통령은 또 '박근혜의 벽'을 넘지 못함으로써 집권 후반기 정책 추동력 상실은 물론 레임덕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정운찬 총리는 대권 도전이라는 꿈을 접어야 하는 것은 물론 9개월여의 방탄총리 자리까지 내놓아야 한다.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전쟁도 그렇지만 월드컵 전쟁도, 세종시 전쟁도 비정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일이 없고,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세상사는 절대로 좋은 일도, 절대로 나쁜 일도 없다. 만약 좋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승자라고 생각하면 곧바로 골칫거리가 생긴다. 인생은 그래서 '회'(悔)다.
 
세종시 전쟁의 승자가 참고할 게 있다. '높은 곳에서는 추위를 이길 수 없다'(高處不勝寒)는 사실이다. 구한말 우리 정치사에도 자주 등장하는 원세개가 청나라 황제가 되려 했을 때 그의 아들이 말리면서 보낸 시다.
 
'장자'에 나오는 '나무닭' 이야기도 재미있다. 황제가 기성자라는 사람에게 세상에서 가장 싸움을 잘 하는 닭을 훈련시키라고 했을 때 한 달이 넘어 가져온 닭 이야기다. 제일 무서운 닭은 허장성세를 부리는 닭도 아니고, 상대방을 보기만 하면 덮치고 공격하는 닭도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 닭이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덤벼도 동요하지 않고, 마치 나무로 만든 닭처럼 반응이 없으니 다들 그냥 가버리는 닭이 최고 싸움닭이라는 얘기다.
 
스스로를 남아공월드컵의 패자라고 생각할지 모를 우리의 몇몇 선수나 세종시 전쟁의 패자도 낙심할 것만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했듯이 지는 일에 익숙해질 필요도 있다. 세상에는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산만큼이나 많고,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도 무수히 많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 필요에 쫓겨 명쾌한 결론 같은 것을 구할 때 현관문을 노크하는 것은 대부분 나쁜 소식을 손에 든 배달부다.
 
혹시 니체의 시가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언젠가 많은 것을 일러야 할 이는/ 많은 것을 가슴속에 말없이 쌓는다/ 언젠가 번개에 불을 켜야 할 이는/ 오랫동안 구름으로 살아야 한다.'
 
패자들이여 지금 뜬구름으로 사는 외로움을 잘 이겨내고 다시 승자로 우뚝 서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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