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원권 뇌물담기,소박스 2억5천만원

머니위크 지영호 기자 2009.06.23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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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위크 커버스토리]5만원의 경제학/ ④상품권의 운명

편집자주 6월23일, 우리나라에서 36년 만에 최고 액면 화폐의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화폐 개혁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고액권'의 탄생이 갖는 의미는 적지 않다. 1년 안에 10만원권 수표의 90% 이상, 1만원권 수요의 40% 가까이를 대체하리라는 예측만큼 벌써부터 만만치 않은 위력도 감지되고 있다. '5만원권' 시대. 최고 액면 화폐의 새 정권 맞이로 분주한 경제ㆍ사회ㆍ문화 각 분야별 동향을 살펴본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로비 의혹이 연일 보도되던 올해 초, 현금의 틈바구니에서 상품권이 등장했다. 현금 최고액이 1만원이다보니 부피도 줄이면서 현금 추적을 받지 않는 상품권이 검은 돈 거래에 제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뭉칫 상품권'을 받은 실력자(?)들은 환전하기보다 인맥 관리를 위해 주변 사람에게 두루 선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현금보다 '선물'의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 과시용으로 적절하다는 판단에서다.



물론 현금에 비해 상품권은 선호도가 낮다. 이용 가치가 한정돼 있다는 단점 때문이다. 따라서 5만원권이 상품권의 로비 수단 기능을 흡수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과거 1억원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007가방이 필요했지만 5만원권이 등장하면 양주상자 하나면 충분하다.

◆캐치 미, 이프 유 캔



고액권 발행으로 가장 우려되는 문제는 '검은 돈' 거래다. 5만원권을 이용하면 같은 부피라도 다섯배의 돈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성을 요구하는 시대 분위기로 인해 경계수위는 한층 높아졌다. 검은 뒷거래를 하는 이들에게는 꼬리가 잡히지 않으면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5만원권의 등장으로 이들은 어떤 방법으로 얼마의 돈을 전달할 수 있을까?

뇌물 전달의 가장 일반적인 거래는 봉투다. 현금 봉투에는 5만원짜리 묶음으로 500만원이 들어간다. 양주상자도 세간의 눈을 피해 돈을 전달하기 좋은 수단이다. 규모가 조금 큰 경우는 신문이나 달력으로 포장을 한 뒤, 포장지로 재차 포장을 한다.


와이셔츠 상자도 괜찮은 포장재료다. 5만원권으로 2억5000만원가량 포장할 수 있다. 쇼핑백에도 쏙 들어가 안성맞춤이다.

5억원가량을 담을 수 있는 007가방은 알려진 것처럼 애용되지 않는다.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나 암흑가 거래나 정치권 거래를 묘사하기 위해 종종 쓰일 뿐이다.

사과상자 역시 2002년 차떼기 사건 이후 모습을 감췄다. 25억원가량을 담을 수 있어 큰 규모의 블랙머니를 전달하기에 좋은 수단이지만 세간에 너무 잘 알려져 부담스럽다.

골프를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는 골프백이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골프백을 옮겨 싣는 모습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골프백에는 50억원 이상이 들어가지만 공간활용(?)보다는 눈속임을 위해 액수를 줄인다. 골프백 바닥이나 클럽 사이사이에 현금을 채우면 감쪽같이 거액의 돈을 전달할 수 있다.

5만원권 뇌물담기,소박스 2억5천만원



◆발행처, '블랙마켓과 무관, 여전히 신장세'


상품권업계에 따르면 현재 상품권시장 규모는 백화점이 2조5000억원, 정유사가 7000억원, 기타 상품권이 5000억~7000억원 수준이다. 시장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백화점시장은 롯데가 가장 큰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롯데가 연매출 1조2000억원, 신세계가 8000억원, 나머지 유통업체들이 5000억원 가량이다.

가장 큰 시장을 이루고 있는 유통업계를 비롯해 대부분의 발행업체는 5만원권 발행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그동안의 자구노력으로 상품권시장이 크게 양성화됐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들의 해석이다.

한 대형 유통업체 관계자는 "이미지 관리를 위해 대량구매에 따른 인센티브 비율을 절반 이하로 줄이고 있다"면서 "매수자 관리를 통해 발행 유무를 엄격히 관리하고 있는데도 최근 2년간 매출 신장률은 두자릿수를 기록할 정도"라고 말했다. 5만원권이 유통되더라도 상품권시장에 미치는 파괴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상품권 발행처가 수급관리를 하는 이유는 상품권의 가치를 보전하기 위해서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백화점 기프트카드도 발행을 거의 중단했다. 기프트카드의 상당수가 상품 구입보다 현금 할인용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과거 상품권의 1등 공신이었던 구두상품권의 몰락은 상품권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시세가 많이 회복되기는 했지만 구두상품권 중 일부는 여전히 액면가의 50%를 밑돌고 있다.

◆기업, 인센티브와 회계관리로 상품권 선호 높아

기업이 소화하는 상품권 물량은 전체 상품권시장의 절반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발행처는 큰손인 기업을 상대로 할인율을 높여가며 판매경쟁을 벌였다.

할인율은 통상 액면가의 5~10% 가량이다. 만약 1억원어치를 구입하면 1억1000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제공받는 식이다. 따라서 기업에서는 영업활동비로 상품권을 구입하고 할인차액을 장부 외 수익으로 충당하기도 한다.

기업의 상품권 구입 목적 역시 '선물'의 의미가 크다. 현금 로비의 경우 배달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상품권에 비해 높고 외부에 알려질 경우 부담도 가중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용처리도 용이해 상품권 구입을 선호하는 편이다.

언더테이블 머니가 활성화된 건설업계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발주처 관리 차원에서 여전히 로비를 하고 있지만 현금 거래는 상당한 부담이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5만원권이 나오더라도 발주처 관리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통시장, 영향은?

상품권 유통의 주체는 백화점이나 정유사 등 발행처, 상품권 매매업소, 기업할인 고객, 일반고객 등으로 구분된다. 이들은 5만원권 발행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고액권의 등장으로 상품권의 사용빈도가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상품권 매매업소에서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한 상품권중개업 대표는 "5만원권은 시장 규모에 비해 결코 큰돈이 아니다"며 "안전한 금융거래를 위해 10만원권 화폐도 하루 빨리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액권 발행은 오히려 환영할만한 조치라는 것.

수표는 그동안 상품권시장에서 빈번하게 사고를 유발했다. 부도수표나 도난수표 사고가 나면 며칠간 수익을 모두 날리지만, 현금에 비해 거래가 많은 까닭에 '울며 겨자먹기'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로비수단이 현금화되면서 상품 시장이 위축되지 않겠느냐는 지적에도 큰 우려를 하지 않는다. 이 관계자는 "설령 검은 돈 거래가 상품권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하더라도 결국 최종 소비자는 상품권 거래를 하게 될 것"이라며 "자금세탁 차원에서 상품권 이용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고 말했다.

◆여전히 블랙마켓 조장할 것, 우려도

하지만 보다 은밀한 거래를 원하는 쪽은 현금을 더 선호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로비 대상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면 로비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 5만원권이 검은 돈으로 쓰일 여지가 높은 이유다.

고액권 문제로 시끄러웠던 지난 2006년 이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꾸준히 고액권 발행 중단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치자금과 뇌물이 근절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액권 발행은 사회적 부패를 가중시킬 것이라는 지적이다.

김건호 정책실 부장은 "경제 규모에 비춰 5만원권의 용이성은 인정한다"면서도 "뇌물이나 정치자금 등 기업이 투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액권 발행은 이를 조장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우려는 비단 사회단체의 목소리만은 아니다. 일부 기업에서도 상품권으로 관리할 수 없는 거물급에게는 5만원권이 용이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한 기업 관계자는 "5억원을 건네려면 '사과상자'가 필요했지만 이제는 쇼핑백으로도 가능해졌다"면서 "재벌과 정치권의 관계를 고려하면 고액권이 블랙머니로 활용될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말했다.

◆상품권 유통시장, 요즘은?

상품권은 액면가와는 달리 시세가 형성돼 있다. 예컨대 A백화점 상품권은 5%, B정유사 상품권은 4%, C제화 상품권은 20% 같은 식이다. 만약 D회사 상품권의 할인율이 7%라면 이 회사 10만원권 상품권을 파는 가격은 9만3000원이라는 이야기다.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주유상품권의 할인율이 가장 낮고, 구두 상품권의 할인율이 가장 높다. 가장 많이 거래되는 백화점상품권은 4~6%의 비교적 낮은 할인율을 적용받고 있다.

상품권 매매업소는 각각의 할인율을 적용해 상품권을 매입한 뒤, 액면가의 약 1~2% 내외의 이익을 붙여 되팔아 수익을 보전한다.

상품권을 구입하는 고객은 주로 물건을 구입하는 소비자다. 만약 5%의 매입가 할인율을 적용받는 상품권을 구입했다면 실제 물건을 구입할 때 5%의 할인이득을 볼 수 있다. 액면가 100만원을 95만원에 사고 소비는 100만원어치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 상품권 매매업소 관계자는 "고객은 주로 해외여행을 떠나려는 사람"이라면서 "출국 전 면세점에서 값싸게 쇼핑을 하기 위해서 구입하는 경향이 많다"고 전했다.

하지만 올해 들어 상품권시장은 재미를 못 봤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해외여행 기피와 명품소비 위축을 가져오면서 상품권 거래량이 줄어든 탓이다. 한 상품권 매매업자는 "작년 거래량의 10분의 1까지 줄어든 때도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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