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부인들은 지금 원화 산다

머니투데이 이상배 기자 2009.03.04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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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쇼핑온 日관광객 '원화예금' 가입 붐

와타나베 부인들은 지금 원화 산다


휴대폰 벨소리와 함께 12자리 이상의 발신자번호가 찍히면 바짝 긴장하게 된다. "국제전화 같은데…. 외국인인가? '헬로'(Hello)라고 하면서 받아야 하나?" 지난 1일 상황은 이랬다.

"여보세요?" 조심스레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오랜만이다. 나 ○○야." 5년간 연락이 끊긴 고향 친구의 전화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을 하다가 부잣집 딸을 만나 동거 중이라고 했다.



서로 안부를 물으며 10여분을 보냈다. 근황 확인이 끝나자 ○○가 본론을 꺼냈다. "일본 애인 부탁으로 뭘 좀 물어보려고 하는데. 너 경제지 기자니까 잘 알까 해서. 지금 엔화를 팔아서 원화 좀 사두면 어떻겠냐?"

그는 일본 애인이 요즘 원화 매입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고 했다. 엔화에 비해 원화가 지나치게 저평가됐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속칭 '와타나베부인'(또는 아가씨)들 사이에 원화투자가 인기라는 얘기였다. 평범한 일본주부를 뜻하는 '와타나베부인'은 금융계에서는 초저금리 엔화로 고수익 통화에 투자하는 일본의 주부투자자들로 통한다.



그동안 초강세를 보인 엔화가 최근 약세로 돌아서면서 지금이 해외통화 투자의 마지막 기회라는 인식이 일본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친구는 전했다. 특히 최근 값이 크게 떨어진 원화가 투자대상으로 각광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달러화에 대해 강세를 보인 엔화는 지난달 중순 약세로 전환됐다. 이에 따라 엔/달러 환율은 지난달 11일 89.9엔에서 지난 3일 97.2엔까지 올랐다(엔화약세).

한편 원화는 지난해 8월말 이후 지금까지 40% 넘게 가치가 절하됐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해 8월말 1089.0원에서 지난 2일 1570.3원으로 45%나 뛰었다. 부쩍 강해진 엔화를 쥐고 있는 일본인들 눈에 원화가 싸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엔화를 팔아 원화를 사는 투자가 이득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현재 원화가 저평가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유럽 위기'가 한창이고 '3월 위기설'까지 나도는 상황에서 당장 원화가 강세로 돌아설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친구에게는 이 정도 이야기밖에 할 수 없었다. "글쎄…. 앞날을 어떻게 알겠냐. 국제 금융시장 상황이 워낙 안좋아서 당분간 원화약세가 계속 갈 것같은데…. 그래도 경상수지 흑자가 2∼3개월 정도 쌓이면 원화도 강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으니까 3개월 이상 묻어둘 수 있으면 지금 원화를 사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같다. 특히 엔화가 계속 약세로 간다면 말이야."



친구와 전화를 끊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은행들이 일본지점을 통해 원화예금을 적극적으로 유치한다면 환율안정에도 꽤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침 지금 일본에서도 원화투자붐이 분다니 말이다.

'환차익'이란 매력으로 '와타나베부인'들을 유혹해서 받은 엔화는 외환시장에서 달러화로 환전한 뒤 다시 원화로 바꾼다. 우리나라에는 엔화와 원화를 직접 거래하는 시장이 없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일본에서 원화예금을 유치하면 결과적으로 국내에 달러화를 들여와 파는 셈이 된다"며 "이는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앞으로 엔화약세가 이어지고 원화까지 강세로 반전한다면 투자자 입장에서는 일거양득으로 환차익을 얻을 수 있다. 일본 입장에서는 엔고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현재 국내 대부분 은행의 시스템상 일본인들이 한국계 은행의 일본지점에서 곧장 원화예금에 가입하기는 쉽지 않다. 실명확인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국내본사와 일본지점의 전산망이 다른 경우가 많아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일본인들의 경우 한국에 쇼핑여행을 왔다가 원화예금에 가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일본 현지에서 원화예금을 원활히 유치하려면 일본 금융당국과 협의를 통한 시스템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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