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면접보러 다녀?"…비밀은 없다

머니투데이 김지산 기자 2009.02.05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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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생존백서-아찔했던 순간]⑭'속마음 털어놓다 속터진 사연'

"너만 알고 있어. 절대 비밀이야"

누구에게나 이런 경험은 있다. 자신의 마음고생이나 남의 얘기를 할 때 주로 이런 전제를 깐다.

학창 시절엔 친구에게 자신의 고충을 얘기하는 게 우정의 척도로 이해되기도 한다. 단순히 '재미 삼아' 친구의 흠을 보기도 한다. 출처가 자신으로 드러나 그 친구와 서먹해진 일도 다반사.



직장에선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직장에서 털어놓을 속마음이란 조직 부적응, 상사에 대한 불신 또는 불만 등이 대부분이다. 은밀히 하는 남의 얘기도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내용이 많다. 놀라운 건 이런 종류의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오래지 않아 직장 상사 귀에 들어가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

#굴지의 대기업 S그룹의 신입사원 N씨.



신방과 재학시절부터 방송국 PD가 꿈이었던 그는 입사 후에도 방송국 주변을 기웃거리며 신입 PD 모집에 뻔질나게 이력서를 내곤 했다. 그러나 매번 탈락했다.

어느날 입사 동기들와 술자리를 가진 N씨. 한 동기에게 PD의 꿈과 입사 지원, 좌절 등을 가감 없이 얘기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인사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더니 급기야 인사팀장의 호출이 떨어졌다.


"자네 요즘 바쁜 것 같아. 어디 면접이라도 보러 다니나?" 단지 이 한마디뿐이었다.

#신체에 관한 흉은 인격모독으로 이어지기 일쑤. 그 대상이 직장 상사라면?



바코드 솔루션 개발업체에 근무하는 S대리(31). 연초 단행된 임원 인사에서 P부장이 상무로 승진해 S사원이 근무하는 마케팅실 실장으로 부임해왔다. 선배들로부터 주워들은 얘기에 따르면 P상무가 깐깐하고 인간적인 면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S사원에게 P상무는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사실 S사원에게 P상무는 구면이었다. 1년전 신입사원 연수에서 사내강사로 P부장의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연수원 화장실. S사원은 봐선 안될 것을 보고야 말았다. P부장이 미끄러운 바닥에 삐끗하는 바람에 가발이 돌아갔다. S사원은 P부장이 민망해 할까봐 얼른 고개를 돌려 못 본 척 했다. 여기까진 좋았다.



S사원은 마케팅실 내 선배에게 비밀이라며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던 P상무 머리의 '정체'를 공개했다. 그저 우스개 얘기꺼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확히 3일 뒤부터 S사원은 선배들로부터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쭐이 난다.

P상무 가발의 존재가 당사자 귀에까지 들어갔고 P상무에게 불려간 부장은 "남의 머리 나 관심 갖는 한심한 사람들"이라는 험한 소릴 들어야 했다.

P상무의 노여움은 부장, 차장, 과장, 대리를 거쳐 S사원까지 내려오는 동안 이스트를 넣은 빵처럼 부풀어졌다.



#D그룹 경영지원팀 H과장. 외부에서 영입된 Y차장과 업무 처리 과정에서 견해차가 빈번했다. 계급이 깡패라고 했던가. 결국 스트레스 쌓이는 쪽은 H과장이었다.

그래도 H과장은 Y차장과 잘 지내기 위해 노력했다. Y차장 앞에선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풀어놓는가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Y차장 결혼기념일엔 선물을 준비하기까지 했다.

그럴수록 K사원 눈에 H과장은 측은하게 보일 뿐이었다. Y차장이 얄밉기도 했다. H과장의 노력을 알아주기는커녕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냉랭하기만 했다.



이 두 사람으로부터 K사원이 곤란에 처해지는 날이 오고야말았다. K사원은 대학 선후배 모임에서 같은 회사 재무회계팀 O차장을 만났다. 평소 사내에서 마주칠 기회가 많지 않아 그다지 친분이 두터운 편은 아니었지만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O차장에게 강한 동지애를 느꼈다.

K사원은 O차장에게 H과장 얘기를 꺼냈다. "얼마전에 온 Y차장 좀 심한 것 같아요. H 과장 불쌍해 못보겠어요…"

다음날 퇴근 무렵 K사원은 H과장으로부터 '함부로 자기 얘기 하고 다니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훗날 인사팀 동기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O차장과 Y차장은 고교 동창이었던 것. O차장의 추천으로 Y차장이 입사하게 된 것이었다.



개인간, 선후배간 신뢰를 어디까지 설정해야 할지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

#반대로 입소문을 내줬을 때 점수를 따는 경우도 있다. '눈치 100단'이 다른 말이 아니다. 자기 입으로 하긴 민망한 것들. 예컨데 결혼이나 아이 돌잔치 같은 것들은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해지면 부담이 덜어진다.

온라인 거래가 활발하지 않던 80년대 중소기업 E전자. 연말 사내에 선행상 행사가 열렸다. '착한 직원'으로 선정되면 부부동반 해외여행 기회가 주어지는 빅 이벤트였다.



응모 또는 추천이 들어오면 심사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입사 2년차 경리팀 C사원은 40여명의 직원들 월급을 은행에 가서 직접 입금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날 L부장의 별도 지시가 떨어졌다. 현금 5만원과 계좌번호가 적힌 쪽지 하나가 건내졌다. 쪽지엔 아동지원 단체인 'XX재단'이 적혀 있었다. 이쪽으로 송금을 지시한 것이다.

C사원은 금방 L부장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런 식으로 입소문을 내달라는 뜻이었다. 소문의 효과는 대단했다. L부장은 응모하지 않았고 누구도 L부장을 선행상 후보로 추천하지 않았다. 소문을 접한 사장은 L부장에게 사실 여부를 파악했다.



나중에 확인된 건 수년째 L부장은 XX재단에 기부를 해왔던 것이다. 일회성 기부였다면 L부장은 오히려 소문의 피해자가 됐을지 모른다. 그만큼 L부장은 치밀했던 것이다.

2000년대 들어 E전자는 연매출 1000억원대 우량회사로 자랐고 L부장은 부사장으로까지 승진했다. L부사장이 퇴임한 이후에도 C사원은 입사 16년만에 재무담당 임원으로 초고속 승진하는 신화적 존재가 됐다.

직장에서 비밀이란 생각보다 잘 지켜지지 않는다. 내가 상대방을 신뢰해 필요이상의 말을 한다면 상대방도 누군가를 신뢰해 얘기가 전해질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중국 서경(書經)에 면종후언(面終後言)이란 말이 있다. 요순시대 순(舜) 임금이 후계자인 우(寓)에게 가르친 말이다. "물러나서 뒷얘기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누군가에게 "이건 비밀인데 당신만 알라"라고 말한 건 돌고 돌아 결국 얘기 속 주인공에게 들어가게 된다고 순 임금은 경륜을 통해 알려주고 있다.

CJ그룹 신동휘 상무는 "국내 대기업 대부분은 멘토링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신입사원들이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며 "타인의 신상에 관한 얘기라면 신중에 신중을 기해 말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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