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 하나 들기 힘드네" 자통법 창구 혼란

박성희 오상헌 기자 2009.02.04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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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통법 오늘 시행… 투자자유형 은행선 3등급, 증권사선 1등급 나오기도

# "그래도 주식형펀드가 가장 많이 팔렸죠".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 시행을 하루 앞둔 3일 오전 펀드 가입을 위해 서울 여의도의 한 대형은행을 찾은 기자에게 상담창구 직원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자통법 시행으로 펀드 권유가 제한되고 상담직원의 '언행'이 조심스러워질 것이라는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알려진대로 가장 먼저 '투자자정보 확인서'가 제시됐다. 작성한 후 이 은행의 투자자 유형 분류 시스템에 넣자 전체 5단계 중 3등급에 해당하는 '위험중립형'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투자위험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예·적금보다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면 일정수준의 손실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유형이다.



직원은 "현재 시스템 미비로 등급별 상품 목록이 정리돼 있지 않다"며 "대략적으로 혼합형상품이면 적합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주식형펀드는 가입할 수 없겠다"는 기자의 질문에 "고객이 원해서 가입했다는 '각서'를 쓰면 문제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창구 직원이 '투자자정보 확인서' 보다 먼저 제시한 자료도 주식형펀드로 구성된 '소득공제 및 비과세 대상 적립식펀드 명세'였다.

# 인근의 한 증권사를 다시 찾았다. 앞선 은행과 마찬가지로 금융상품에 대한 지식수준과 손실 수준 등 거의 동일한 문항으로 구성된 설문지를 건넸다. 그러나 웬걸, 같은 답변에도 불구하고 기자의 투자성향은 가장 보수적인 '안정형'(1등급)으로 분류됐다. 매달 10만원씩 적립식 펀드에 가입하고 싶다고 하자 상담 직원은 "고객님의 투자성향으론 종합자산관리계좌(CMA) 밖에 추천해 드릴 수 없다"고 했다.



자통법 시행을 불과 하루 앞둔 일선 창구는 '우왕좌왕' 그 자체였다. 투자자 유형 분류는 물론이고 위험등급별 펀드 분류도 전산화되지 않았다. "자통법 시행이 코 앞이지만 아직 업무 지침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내일이라고 달라질 게 있겠나. 당장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고 창구 직원들은 입을 모았다.

"펀드 하나 들기 힘드네" 자통법 창구 혼란


◇ 길어진 시간만큼 투자자 만족도도 높아지나
펀드 가입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상담시간이 매우 길어졌다는 것이다. 업계가 정한 표준투자권유준칙에 따라 설문을 작성하고 상품 설명을 듣는 데만 30분 이상이 걸렸다. 여기다 가입서류작성하고 사인하면 1시간 정도 걸렸다.
문제는 시간이 길어진만큼 투자자 보호와 만족도도 높아지느냐다. 기자가 직접 체험한 바로는 여전히 금융사가 '팔고 싶은 상품'이 투자자에게 적합한 상품을 압도했다.

◇ 투자자 분석 실효성 있나
투자자 성향 분석도 금융사별로 천차만별이다. 게다가 상담직원의 '성향'까지 더해지면 추천 상품은 'CMA'에서부터 '주식형펀드'까지 판이하게 달라진다.


'위험중립형'으로 나왔음에도 주식형펀드를 추천한 은행직원은 "고객이 원한다면 어떤 상품이든 투자할 수 있다"고 했고, 'CMA'를 추천한 증권사 직원은 "상품 설명은 할 수 있으나 권유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현재 상품 설명과 권유에 대한 명확한 구분은 없는 상태다.

설문지 한 장으로 투자자 자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한 판매사 직원은 "이미 다른 금융사에서 10억원을 보수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투자자가 적립식 펀드에 10만원을 투자한다면 투자자 전체 포트폴리오로 봤을 땐 충분히 공격적으로 투자할 수 있지만 현재 상황으로선 불가능하다"고 꼬집었다.



일부 파생상품은 판매와 관련한 명확한 지침이 없는 상태여서 고객과의 마찰도 예상된다. 인기가 높은 인덱스펀드의 경우도 판매사에서 곤혹스러워하는 부분이다. 지수를 추종해 비교적 안정적인 수익을 추구하지만 현·선물거래로 일부는 파생상품으로 분류돼 있기 때문이다.

판매사도 불만이다. 투자자 보호와 관련해 조항 자체가 애매한 데다 당국에서도 세부 규정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 월 10만원의 적립식자금을 받기 위해 1시간 넘게 상담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도 손해다. 한 증권사 고위관계자는 "직원이 장시간 공을 들이고도 고객이 '집에 가서 생각해 보고 오겠다'면 판매사로서는 큰 손실"이라고 토로했다.

김일선 한국투자자교육재단 상무는 "투자자가 정보를 제대로 제공해야 적합한 상품을 소개받을 수 있게 돼 투자자 책임이 더 중요해졌다"며 "안정성과 수익 사이에서 투자자가 냉철한 판단을 내린 뒤 판매사를 찾아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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