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가와 전략가에 대한 소고

김소희 말콤브릿지 대표 2008.12.23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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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으로 본 세상]전략과 신념은 유연함을 갖춰야

신념가와 전략가에 대한 소고


뜻밖의 경우를 당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 놀라기는 해도 그런 경우들에 익숙해져 가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세상에는 비범한 사람들도 있는 법이어서, 이들은 평범하게 익숙해져 가기보다는 ‘자각’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여기엔 두 가지 모습이 존재한다. 첫 번째 종류의 비범한 사람들은 이 뜻밖의 경우를 자신의 신념에 비추어본다. 그 중 결코 변할 수 없는 신념들을 완고히 가진 사람들은 강한 거부감이나 확고한 믿음들을 재발견하면서, 사태에 대한 비판이나 찬사를 쏟아낸다.



아마 우리가 간혹 느끼는, 신념이 강한 사람들에 대한 피곤함이란 이런 데서 발생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변하지 않는 신념만큼 피곤한 것도 없다. 바다처럼 깊고 넓어지지 못하고, 아래로만 육중하게 가라앉거나 얄팍하게 옆으로만 퍼지는 신념들은 참으로 골칫거리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뜻밖의 경험들을 자신의 신념에 비추어보며 더 풍성한 깊이를 더해가기도 한다. 이들은 현실의 충격으로부터 자신의 추상적인 신념을 보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과감히, 현실에 맞지 않거나 부족한 자신의 신념을 조금씩 부수고는 다시 풍성하게 세워나간다. 왜냐하면 신념이란 애초에 ‘옳고자’ 하는 것이었으므로, 마땅히 옳은 쪽으로 변화하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선 분명히 성공의 가능성이 발견된다. 아마 이들은 비즈니스는 물론, 정치나 문학, 철학 어느 분야에서건 성공할 수 있는 일종의 순수한 천재들이다. 단지 세상이 어설픈 신념가들에게 지친 나머지 이들을 너무 빨리 속단해 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한편 세상에는, 무거운 신념 같은 것에 세상을 비추어 보기보다는, 세상이 가르치는 대로 매우 현실적인 깨달음을 하는 비범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뜻밖의 경우를 당했을 때, 눈치를 채버린다. ‘아하, 이런 것이었군’ 하면서 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충격에 그저 익숙해져 가는 동안,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세상의 ‘공식’들을 깨닫고 정리해둔다. 마침내 어떤 변수를 통해 세상이 이렇게 움직일 수 있음을 꿰뚫어버린 그는, 이제 세상에 스스로 바둑돌을 놓아본다. 과연, 자신의 공식이 맞는지 가슴 떨려 하면서 말이다.

공식이란 원래 적용하기 위해 정리해두는 것이 아니던가. 짜릿한 성공과 끔찍한 실패. 여러 시행착오를 통해 그는 더 영리하고 정확한 공식들을 완성해낸다. ‘이렇게 하면 일이 저렇게 된다’라는 예측력을 점점 선명히 갖추어가면서 말이다.

물론 이런 사람들 중에서도 정말이지 여러 종류의 부류가 있기는 하다. 어떤 사람들은 아하,하고 깨달은 뒤, 바로 실행해본다. 그리고는 바로 실패하고 바로 마음을 접어버린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깨달은 바를 깊이 믿고 있으면서 한번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기도 한다. 이들에겐 아마도 실행해 옮겼다가 틀리는 걸 확인하느니, 그저 고이 모셔두는 것이 훨씬 나은지도 모르겠다.

진실로 비범하게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이치를 자각하는 지성, 스스로 시도하는 용기, 실패를 수정하는 책임감이라는 3요소가 맞물려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들을 지속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더 놀라운 영감으로 이끌어 준다.

이런 사람들에게도 성공의 가능성이 분명히 발견된다. 어쩌면 비즈니스에서의 성공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몫인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신념가들과는 달리, 세상의 어떤 부분을 쉽게 인정해버리므로 ‘전진’이라는 포커스에 더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가 ‘전략가’이건 ‘신념가’이건,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면 어느 순간 그들은 서로 닮아있게 된다. 신념가로 출발한 사람은 전략가의 자질을 갖추게 되고, 전략가로 출발한 사람도 궁극적으로는 신념가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모 기업의 CEO는 소위 말하는 운동권 출신이다. 그는 여전히 스스로의 신념에 충실하면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오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운동권이란 단초는 정치적 장식도 아니요, 낭만도 아닌 그저 고스란한 삶의 여정일 뿐이다.

학창시절의 열정과 논리를 부정하지도, 고집하지도 않는 그는 오히려 세상의 경험이 자신의 신념을 더 풍성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고 말하곤 한다. 그는 신념이 없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는 법을 깨달아 온 셈이다.

또 다른 기업의 CEO는 젊고 영리한 아이디어맨으로 시작했다. 그다지 큰 사회적 대의 같은 것은 없었고, 그저 ‘아, 이게 장사가 되겠다’라는 아이디어가 적중하면서 중견기업의 자리에까지 오른 자타공인의 재간꾼이다.

그러나 사업한지 10년차를 훌쩍 넘긴 지금, 가끔 만나면 그는 철학가의 모습과 닮아있다. 시장이 그에게 경영철학을 가르쳐주었다고나 할까. 이런 제품은 곤란하고, 이런 제품을 소비자가 받아들인다는 것을 끝없이 호흡해오면서, 그는 시장에 대한, 소비자에 대한, 나아가 사회에 대한 기업의 입장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필자가 지극히 좋아하는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이들에겐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왔기 때문에 계속해야 한다는 속박이 없으므로, 이들은 기꺼이 자신을 바꾸어왔다. 그 유연함이야말로, 전략과 바른 신념을 가져다 준 가장 건강한 에너지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그다지 자기 자신에게 매달리지 않는다. 체면이나 관행, 타인의 시선 같은 것은 그들이 꿈꾸었던 것을 실험해보고 확인하는 것에 비하면 정말이지 얼마나 작은 것인가.

불경기로 우울한 뉴스들이 연잇고 있는 세밑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불경기이거나 호경기이거나, 성공의 신화가 쓰여지지 않은 때는 없었다. 아마도 지금 이 불경기 또한, 어느 신념가나 전략가에겐 놀라운 자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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