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줄' 막힌 기업, 퇴직금 중간정산도 거부

머니투데이 여한구 기자 2008.12.02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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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이후 기업요구로 생긴 제도… 거부해도 위법 안돼

봉급생활자에게 퇴직금은 '최후의 보루'다. 국민연금과 더불어 불안한 노후의 소중한 버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퇴직금은 정 다급하지 않으면 건드리지 않으려 한다.

반면 기업은 근로자들의 호봉이 높아질수록 지급해야할 퇴직금이 많아져 가급적 중간에 미리 정산하려 한다.



미국발 글로벌 경제위기는 이런 '퇴직금 풍속도'마저 바꿔놓고 있다.

2일 산업계와 노동부에 따르면 경제위기가 우리나라에도 실물경제 침체를 불러오면서 퇴직금 중간정산이라도 받길 원하는 근로자들이 증가하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은행 빚을 내서 '내 집'을 장만한 직장인들은 급등한 주택담보대출 이자가 무서워 퇴직금을 당겨 받아서라도 원금 일부를 메꾸려 하고 있다.

여기에 자산증식의 '지름길'로 여겼던 주식과 펀드 마저 거의 '반토막'난데다, 임금은 물가상승률에도 못미쳐 실질소득이 감소해 그나마 온전히 보전돼 있는 퇴직금이라도 끌어다 쓸 수 밖에 없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경제위기는 근로자들의 권리로 여겨졌던 '소박한 희망' 마저도 봉쇄하고 있다.


신용 경색이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내수 침체에 따른 실적 악화에 시달리는 회사들이 근로자들의 퇴직금 중간정산 요구가 이어지자 중간정산 제도 운영을 중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국내 굴지의 A회사는 최근 "회사 자금사정이 좋아질 때까지 퇴직금 중간정산을 잠정 중단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내부 전산망을 통해 공지했다.

세계적인 소비 침체로 수출길이 막히면서 조업 중단이라는 '극약 처방'을 쓴 쌍용차는 공식적으로 퇴직금 중간정산을 보류한다고 노조에 통지했다.

A회사에 다니는 나모씨(여·33)는 "1억5000만원을 대출받아서 장만한 아파트의 이자 부담이 월 100만원을 넘어서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남편과 함께 퇴직금 중간정산을 받아서 메꾸려고 했는데 이 마저도 할 수 없게 됐다"고 한숨을 쉬었다.

경제위기가 본격화되기 이전에만 해도 '근로자는 중간정산을 받기 싫은데, 회사는 받으라고 강요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해 사회문제화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본래 퇴직금 중간정산 제도 자체가 10여년전 외환위기의 산물이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중간정산 제도가 없었지만 퇴직금이 퇴직 전 3개월 평균임금을 기준으로 지급되면서 적립에 부담을 느낀 경영계에서 중간정산제 도입을 요구해 성사됐다.

일부 회사에서는 발생할 퇴직금을 연봉에 미리 포함시켜 월단위로 분할지급하는 편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부는 논란이 커지자 분할지급에 대해서는 2006년 7월부터 법으로 금지했다.

현재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8조2항은 '사용자는 근로자의 요구가 있을 경우는 퇴직 전에 퇴직금을 미리 지급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따라서 회사가 퇴직금 중간정산을 거부해도 법적 저촉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나마 퇴직금 중간정산을 거부한 회사는 나은 편이다. 기업 형편이 어려워 퇴직금 자체를 지급하지 못하거나 회피하는 곳도 늘고 있다.

올해 10월말 기준 전체 퇴직금 체불금액은 2835억1300만원으로 지난해 10월(2490억9100만원)보다 크게 증가했다. 퇴직금을 못받은 근로자수도 23만534명에서 27만3385명으로 늘었다.

정부가 도산한 기업을 대신해 체불임금을 지급하는 체당금 지급액도 1252억2500만원에서 1453억1000만원으로 증가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민원이 많아 중간정산 자체를 금지하는 내용으로 관련 법을 개정하려고 하는데, 기업 스스로 회피하는 상황이 빚어져 난감하기도 하다"면서 "내년에는 퇴직금 체임 증가폭이 올해보다 훨씬 클 것으로 보고 대책을 준비 중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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