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클릭]한국은행과 '영국식' 신호등

머니투데이 권화순 기자 2008.10.20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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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차 런던에 다녀왔습니다. 모처럼 맑게 갠 런던의 가을을 만끽하며 미국 월스트리트에 버금가는 런던 금융가 '씨티'를 걸었습니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뱅커들이 바쁘게 지나갑니다.

좌우를 살피던 한 뱅커가 빨간 불에도 횡단보도를 건넙니다. 신호등 버튼을 누르고 파란불로 바꿔 건너는 뱅커도 있습니다. 이게 '영국식' 교통 문화라고 합니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다 그만 머쓱해졌습니다.



이날(현지시간 8일) 씨티에 자리 잡은 영국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인하했습니다. 대규모 구제금융도 투입됐습니다. 내로라하는 글로벌 금융사들이 손을 벌립니다. 유럽 각국은 은행간 거래에 지급보증을 약속했습니다. 좌우 살필 것도 없이 '영국식'으로 금융위기를 서둘러 건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좀 덜 급했던 걸까요.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 정부와 한국은행은 좀 굼떠 보였습니다. '파란불'로 바뀌길 기다리는 듯 했습니다. 특히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의 발언이 그랬습니다.



그는 "시장에서 조정되길 바란다. 중앙은행에서 전면에 나서 조정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은행간 거래에 대한 지급보증을 언급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과도 '엇박자'를 냈습니다.

한은은 18일 '경쟁입찰을 통한 스와프 거래'를 도입키로 했습니다. 국제 신용평가사가 국내 금융기관의 신용등급을 줄줄이 하향 조정한 뒤였습니다. 은행이 경쟁 입찰을 통해 필요한 만큼 달러를 구할 수 있단 설명입니다.

은행권에선 여전히 볼멘소리가 나옵니다. 참여 은행이 문제였습니다. 경쟁입찰엔 국내 은행 뿐 아니라 외국계 은행과 외은지점도 포함됐습니다. 이들이 공격적으로 나온다면 '달러 싹쓸이'가 우려된다는 겁니다.


같은 이유로 정부는 수출입은행을 통한 유동성 공급 지원 대상에 씨티은행, SC제일은행을 뺐습니다. 가능한 국내 은행에 혜택이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겁니다.

물론 외국계 은행을 제외한다면 통상 마찰이 우려됩니다. 대신 한 금융사가 20%이상 달러를 받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시장금리와 동떨어진 금리를 제시하면 낙찰에서 제외키로 했지요. 한은 관계자는 "외은 지점 등은 본점에서 달러를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입찰에 적극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은행권은 '안이한' 생각이라고 꼬집습니다. 전날 스와프 시장에서 외국계 금융기관이 높은 금리를 주고 달러를 싹쓸이 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통화스와프(CRS) 1년물 금리가 0%까지 하락했지요. 원화를 빌려주고 달러 자금을 받을 경우 원화 이자를 받을 수 없다는 얘깁니다.

위기에 몰린 은행권과 한은의 '온도차'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통상마찰'을 걱정할 정도의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게 은행권의 시각이지요. 아무래도 한국은행엔 '영국식 신호등'이 필요한 때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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