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 내 펀드, 깡통에 울고 오리발에 '열불'

머니위크 황숙혜 기자 2008.11.01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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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위크 커버스토리]주가폭락이 빚은 풍속도

악! 내 펀드, 깡통에 울고 오리발에 '열불'


# "내가 뭐랬어. 하지 말랬지."

저녁시간, TV 뉴스에서 '주가 폭락', '펀드 손실', '깡통 계좌' 등 최근 주식시장에 관한 소식이 흘러나올 때면 어김없이 집안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신혼 가정의 평화를 깨뜨린 것은 다름 아닌 펀드다. 남편의 완강한 반대를 꺾고 기어코 목돈을 주식형펀드에 넣었다가 손절을 고민하기 힘들 정도로 손실이 발생하자 부부싸움이 잦아진 것.



가뜩이나 물가가 뛰어 팍팍해진 살림살이에 꼭 필요한 지출 항목도 줄여야 할 상황이다. 한 푼이 아쉬운 처지에 목돈이 증발해 버렸으니 애써 누르고 있던 화가 자신도 모르게 치밀어 오른다.

"넌 항상 그런 식이야.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말다툼은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 확대되기 마련. 펀드 손실에서 시작된 부부싸움은 인신공격성 발언으로 비화 된다.



미안한 마음에 죄 지은 얼굴을 하고 있던 아내. 이쯤 되면 참지 못하고 덩달아 언성을 높인다. 늘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부부싸움이 이제 진저리가 나지만 날로 커지는 손실폭만큼 서로 앙금이 더 높이 쌓이기만 한다.

이른바 대공황 이후 최대 위기라는 금융위기 속에 주가가 속절없이 추락하자 상승기에 없던 새로운 풍속도가 나타나고 있다.

한 은행의 PB는 "펀드 손실과 함께 가정불화로 이중 고통을 겪는 집이 적지 않다"며 "투자 판단을 내릴 때 배우자와 함께 의논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애정전선 갈라놓은 펀드투자

# 속칭 '투자 울렁증'을 가진 직장인 여성 A씨는 남자친구와 결별할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손해배상 소송까지 낼까 고민 중이다. 연인 사이에 이토록 깊은 골을 파 놓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러-브'펀드.



펀드 투자를 강력하게 권유한 것은 A씨의 남자친구였다. 평소 원금이 깨질 수 있는 펀드와 주식은 멀리할수록 좋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던 A씨는 수개월 동안 남자친구의 끈질긴 권유를 강하게 뿌리쳤으나 '손실이 날 경우 책임지겠다'는 다짐을 받고 투자 결정을 내렸다.

우려했던 대로 펀드에서는 크게 손실이 발생했고, 책임을 지겠다던 남자친구는 이제 와서 오리발이다. 펀드를 환매해 손실을 확정 짓든 그대로 유지하든 알아서 하라는 식.

투자 원금을 거의 날린 것도 참기 힘든 일이지만 A씨를 더 화나게 하는 것은 남자친구의 태도다. 식욕감퇴와 불면증에 시달리며 힘겨워하던 A씨는 인간적인 실망감 때문에 급기야 남자친구와의 결별과 손해배상 청구를 고민하기에 이르렀다고 털어 놓는다.



"손해배상 받을 수 있을까요? 혹시 헤어진다고 해서 배상을 못 받는 건 아니겠죠?"

◆속수무책… 비자발적 장기투자

악! 내 펀드, 깡통에 울고 오리발에 '열불'
홍콩H주가 2만선을 돌파할 무렵 중국펀드에 거치식으로 가입한 직장인 B씨. 중국 증시가 신천지라는 환상에 젖어 과감한 베팅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이때가 상투일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지수가 슬슬 꺾이기 시작했을 때 주위에서 손절매를 권유했지만 '본전' 생각에 버텼던 것이 '반토막'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사실 B씨는 펀드에서 발생한 손실 규모가 정확히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 10% 내외로 손실이 발생했을 때만 해도 노심초사하며 가끔 밤잠도 설쳤지만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손실이 커지자 망각과 체념이라는 신체의 자기방어 시스템이 작동한 것.

악! 내 펀드, 깡통에 울고 오리발에 '열불'
당초 3년가량 투자할 생각으로 펀드에 가입한 B 씨는 이제 은퇴자금이라 생각하고 묻어 둘 작정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비상금을 어느날 우연히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없는 돈으로 여기고 있다가 언젠가 '중국 증시 급등'이라는 소식이 일간지 헤드라인을 장식할 때 장롱 속에 묻어둔 펀드 통장을 꺼내 볼 것이라는 얘기다.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손실이 커지자 이른바 '비자발적 장기투자자'가 속출하고 있다. 장기투자는 가장 중요한 투자 철칙 중 하나다. 하지만 투자자들의 선택이 진정한 장기 투자가 아니라 폭락장이 빚어낸 올가미라는 사실은 씁쓸한 단면이다.

◆가입 권유, 손실에 "나 몰라라"

# "은행이 이럴 수가 있나요."



"은행 직원한테 사기 당했는데 구제 받을 방법이 없을까요."

펀드 판매사의 불완전 판매는 속칭 '펀드 르네상스'가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고질적인 병폐로 꼽히는 문제다. 주가 폭락으로 펀드 손실이 커지자 불완전 판매 문제도 부각되는 양상이다.

시장 상인 C씨는 자신도 모르게 펀드에 가입했다가 30% 이상 손실이 발생한 경우다. 이자소득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보통예금통장에 모인 자금을 CMA(종합자산관리계좌)에 옮기라는 딸의 권유로 증권사를 찾은 C씨는 영업 직원이 시키는대로 신규가입 서류에 서명했다.



"당시 원금에서 손실이 발생하지 않는 상품이라는 사실을 직원에게서 몇 번이고 확인받았어요. 심지어 연10%의 수익이 난다는 얘기까지 들었는데 어느 날 보니 펀드에 가입이 돼 있고, 30% 넘게 손실이 발생했지 뭐예요."

C씨의 딸이 흥분하며 불완전 판매라고 주장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머니가 가입 당시 직원으로부터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듣지 못한데다 통장조차 받지 못했다는 것.

◆투자포럼 취소·항의 대응 고심…업계도 '비상'



폭락장에 울상 짓는 것은 투자자뿐만이 아니다. S은행의 한 지점은 아침 회의 때마다 '고객들의 항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주요 논제다. 강세장에서는 어떤 상품을 주력으로 판매할 것인지, 어떤 고객을 집중 공략할 것인지를 놓고 중지를 모았지만 얼어붙은 시장 상황이 회의 분위기마저 바꿔 놓았다.

올 연말에는 현란한 증권사 투자포럼도 구경하기 힘들 전망이다. 지난해 증권사들은 투자포럼에 인기 가수그룹을 초청하는 등 장밋빛 새해 증시 전망과 함께 잔치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지지선 전망이 무의미한 패닉 장에 연말을 맞는 증권사 리서치센터는 난감하다는 표정이다.

일부 증권사는 새해 전망을 위한 투자포럼을 계획했으나 취소하는 쪽으로 잠정 결정했다. 국내외 증시가 시계제로인 상황에 낙관적인 전망을 펼 수도, 그렇다고 비관 일색의 예측을 내놓을 수도 없는 입장이라는 것.



예정대로 투자포럼을 준비중인 증권사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기업 실적과 환율, 경제성장률 등 굵직한 경제지표를 전망하기에 불확실성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한 달 가량 앞둔 투자포럼을 예정대로 진행할 계획이지만 아직 거시경제 지표의 전망치를 확정하지 못한 상황"이라며 "지난해처럼 떠들썩한 퍼포먼스 없이 조용한 포럼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밖에 증권업계는 투자설명회에도 소극적이다. 폭락장에 투자자를 만나 시장 전망을 제시하기가 부담스럽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전문가의 조언이 가장 절실할 때 투자자를 외면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라는 자조 섞인 비판도 제기한다.



주가 상승에 취해 있다가 냉혹한 현실을 맞은 투자자들 사이에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밀어내기식 판매 실적에만 열을 올렸던 금융회사와 투기적으로 베팅했던 투자자들 모두 기본으로 돌아가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가야 한다는 것.

주식시장에 한파가 일자 최근 몇년 동안 재테크 관련 서적으로 쏠쏠한 장사를 했던 출판업계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나 일부 투자자들은 기초부터 제대로 공부해 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친다. "펀드에 대해 공부하려면 어떤 책이 좋은지, 님들 추천 좀 해 주세요."

펀드에 '물린' 사연도, 위기에 대응하는 자세도 각양각색이다.



100억짜리 펀드가 깡통으로

샐러리맨에게 100억원은 평생 쥐어보기 힘든 금액이다. 평생 걸려도 다 못 쓸 것 같은 거액이 불과 1년 사이에 공중분해 된 소설 같은 일이 벌어졌다.

고액자산가 D씨가 한 중국펀드에 100억 원을 투자한 것은 올해 초였다. 지난해 10월 이후 급락하던 중국 증시가 연초 반등을 보이자 속칭 '올림픽 랠리'가 이제 시작된 것으로 생각한 것.



하지만 예상과 달리 중국 주가는 폭락 양상을 지속했고, 펀드에서도 커다란 손실이 발생했다. 이 때 D씨가 택한 전략은 펀드담보대출을 받아 대출금을 이 펀드에 추가 불입한 것. 손실이 난 펀드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물타기'를 한 셈이다.

간절히 반등을 기다리는 B 씨의 바람에도 중국 증시는 속락했고, 펀드 자산가치는 대출가용액을 하회해 결국 강제 환매되고 말았다.

은행의 담당 직원은 100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 눈 녹듯 사라져버린 현실 앞에 마치 자신이 큰돈을 잃은 듯 잠시 망연자실했다고 전했다.



최근 주가가 폭락하는 사이 담보대출로 인해 펀드가 '깡통'이 되어버리거나 강제환매 위기에 처한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특히 최근처럼 주식시장의 변동성이 큰 경우 펀드 자산가치가 하락할 위험이 커지기 때문에 펀드담보대출을 이용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 상환 계획이 구체적으로 세워진 단기 자금이 아니면 섣불리 레버리지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업계 관계자는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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