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2대를 낳은 가풍

파주=이경숙 최은미 기자 2008.06.23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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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가족, 쿨패밀리]<1-2>아버지 노관택 박사가 말하는 '나의 삶, 나의 가족'

편집자주 우당 이회영 등 6형제는 신라, 고려, 조선 3조에 걸쳐 문벌이 높은 '삼한갑족'의 후손이었다. 다섯째인 이시영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뺀 나머지 5형제는 모두 독립운동 중 사망했다. 경주 최 부자 집안은 300년, 10대에 걸쳐 부를 지켰다. 독특한 가훈과 가풍이 이 집안의 부를 유지했다. 지금, 우리도 현대판 경주 최 부자, 우당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머니투데이는 고속성장과정에서 잊혀졌던 한국판 노블리스오블리주의 가족을 찾아 그들의 가풍과 철학을 전하고자 한다.

↑노관택 파주병원 난청센터장. 명의의 집무실은 낡은 회전의자만큼이나 수수했다. ⓒ이경숙 기자 ↑노관택 파주병원 난청센터장. 명의의 집무실은 낡은 회전의자만큼이나 수수했다. ⓒ이경숙 기자


명의의 방은 좁았다. 2평반 남짓한 공간에 철제책상과 캐비닛, 낡은 소파가 빼곡히 들어찼다.

청우(靑旴) 노관택 경기도립의료원 파주병원 난청센터장(78)은 이비인후과 최고 명의로 꼽힌다.

경력도 화려하다. 서울대병원장, 아시아 오세아니아 이비인후과학회 연합회 이사장, 한림대의료원장, 대한병원협회 회장, 국제병원연맹(IHF) 이사를 지냈다.



박윤형 순천향의대 학장은 "노 박사는 우리나라 청각 분야의 1인자"라고 말했다. "지금 은퇴해서 그렇지 우리나라 청력센터의 창시자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고도 덧붙였다.

그런 명의가 시골병원으로 간 이유는 단순했다. '의사가 없어서'.



2005년, 노 박사는 당시 경기도립의료원장이었던 박 학장에게 시골에 청력 문제가 심각한 노인환자가 많으니 '난청센터'를 개설해보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와서 일하려는 전문의가 없었다. 이비인후과를 개원하면 장사가 잘 되는데다 공공병원은 보수가 낮고 근무환경도 열악하기 때문이었다.

파주병원 환자들은 가난했다. 입원환자들은 간병인을 채용할 돈이 없어서 공동간병인을 쓰기도 했다.


박 학장은 "노 박사께서 직접 와 달라"고 요청했고 노 박사는 선선히 응했다.

노 박사는 가난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6년짜리 중학교를 월반해 4년만에 졸업한 수재였지만 그는 해양대에 지원했었다. 그의 집안은 그를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보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때 해양대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비까지 면제라고 해서 시험 쳤었어. 서울대 의대는 도전정신 하나로 (원서를) 넣은 거였어. 두 곳 다 합격했는데 한학자인 선친이 '자식 뱃놈 안 시키겠다'고 하셔서 서울대에 갔지."

그의 이웃들도 가난했다. 지금은 사라진 그의 고향, 울주군 온산면엔 60년대 말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당연히 의료서비스는 꿈도 꾸지 못했다.
↑우리 나이로 내년에 팔순을 맞는 <br>
노관택 센터장은 자주 보는 파일과 <br>
가족 사진을 USB칩에 넣어다닐 정도로<br>
컴퓨터 사용에 능숙하다.ⓒ이경숙 기자↑우리 나이로 내년에 팔순을 맞는
노관택 센터장은 자주 보는 파일과
가족 사진을 USB칩에 넣어다닐 정도로
컴퓨터 사용에 능숙하다.ⓒ이경숙 기자
광주 노(盧)씨 경평공파 소재선생 16대손인 그가 제사 같은 집안일로 고향에 돌아오면 새벽까지 사람들이 그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의사가 왔다'는 소식에 마을 바깥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젊은 의학도였던 그는 그저 자신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보람을 느꼈다. 세월이 흘러 명의로 칭송 받게 된 후에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일화 한 토막이 있다. 서울대 부교수 시절, 수술한 환자의 아버지가 선물을 가져왔다. 겹겹이 싼 포장지를 뜯어보니 한 모금에 마실 만한 작은 와인이었다. 비행기에서 공짜로 받은 것인지 '비매품' 표시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했어요. 비행기를 탈 것 같지 않은 행색의 사람이, 포장까지 곱게 해 이걸 갖다 준 마음이 뭘까. 아마 그분은 그 와인이 비행기에서 주는 것인지도 몰랐을 거야. 남한테 받은 걸 아끼고 아끼다 갖다 준 것 같더라구. 너무 고마웠지. 성의가 대단하잖아. 수십 년 된 와인보다 더 귀한 것이라고 여기저기 자랑했지."

그는 "의사란 인술(仁術)을 베푸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옛날엔 시골사람들이 의사한테 호박과 고구마 가져다주면서 진료 받았잖아요. 요즘엔 못 그러죠. 요즘은 의사가 편한 돈벌이를 제공하는 직업 정도로 인식되는 것 같아요. 의대생들 보면 별 사람이 다 있어. 사회적 문제야."

그러나 적어도 그의 아들, 노동영 박사(52)는 '요즘 사람들'과 다른 부류인 듯하다. 유방암 치료의 세계적 권위자이면서도 그의 아들은 '환자와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게 미안해서' 매일 아침일과를 환우회 홈페이지에 답글 달기로 시작한다.

유방암 환우회원들에게 아들인 노 박사는 '우상' 같은 존재다. 진료 외 시간에도 환우들을 돌봐주고, 유방이 훼손됐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상처 받지 않도록 신경 쓰는 의사가 어디 흔할까. 어진 마음이 부전자전이다. 아버지인 노 박사 역시 그 마음을 선친인 고(故) 노진환 옹한테 배웠다.

"아버지는 남일 잘 도와주러 다니는 분이셨어요. 온 동네 사람들 혼례와 장례를 다 챙기고 다니셨지. 우리 마을에서 전통혼례나 장례식 절차를 격식에 맞춰 다 아는 사람이 드물었거든. 마을의 존경 받는 어르신이었지."

그의 아내, 최윤보 여사(74)는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시아버지라고 말하곤 한다. 대학생인 남편을 서울로 보내고 혼자 지내는 며느리가 안쓰러웠는지 선친은 직접 부엌일까지 거들었다. 그 시절 유학자 집안에선 드문 일이었으리라.

그의 집안에서 가훈인 '인의예지'는 삶에서 삶으로 전해졌다. 아버지 노 박사는 요새 젊은이들을 위해 '인의예지'를 이렇게 풀어 말한다.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의(義)는 옳지 않은 것을 미워하는 것, 예(禮)는 남을 생각하고 양보하는 것, 지(智)는 옳고 그른 것을 총명하게 판단하는 것.'

가풍은 자손들을 일일이 가르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분위기나 정신이 암암리에 흘러드는 것, 인품이나 격, 자연히 느끼고 터득하게 되는 무언가"라고 했다.

"제대로 된 가정에서 제대로 자란 사람은 범죄자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 문제 있는 가정이 문제 있는 사람을 만드는 거지. 꼭 가르치거나 말로 하지 않아도 다 아는 가정의 문화가 있어야 해요."

어진 가족은 어진 가족과 사돈을 맺었다. 그는 자신의 사돈, 이현재 전 국무총리에 대해 "어진 사람, 성인, 굉장히 착하다"고 말했다.

"동영이가 결혼하기 전엔 서로 잘 몰랐어요. 당시 그 분이 서울대 총장이었는데 가깝진 않았지. 지금도 가깝진 않아. 사돈은 가깝게 지낼 수 없는 사이야. 취미도 달라. 나는 술과 골프를 좋아하는데 그 분은 안 그래요. 허허."

우리 나이로 내년에 팔순을 맞는 그의 주량은 소주 1병. 33년 이웃사촌인 연희동 주민들과 함께 달마다 각종 모임 4개를 즐길 만큼 건강하다.
↑노관택 센터장 집무실의 창가. 그는 요즘 일본어 원서로 '인간이라는 것은'과 '현대인을 위한 뇌 단련'을 읽고 있다. ⓒ이경숙 기자↑노관택 센터장 집무실의 창가. 그는 요즘 일본어 원서로 '인간이라는 것은'과 '현대인을 위한 뇌 단련'을 읽고 있다. ⓒ이경숙 기자
◇노관택 박사 약력
△1930년 경남 울산군 온산면 생
△1967~1995년 서울대 의과대학 강사, 부교수, 교수
△1981∼1984년 대한이비인후과학회 이사장
△1990~1993년 서울대학교병원장
△1991∼1996년 아시아 오세아니아 이비인후과학회 연합회 이사장
△1995∼2001년 한림대의료원장
△1998∼2000년 대한병원협회 회장
△1999~2003년 국제병원연맹 이사
△2005년~ 경기도립의료원 파주병원 난청센터장
△학력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사(1955년) 및 의학 박사(1963년), 미국 펜실베니아대학 대학원(1960년)ㆍ일본 대판시립대학 의학부 청각학(1969년)ㆍ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 신경이과학(1973년) 연수
△상훈 = 한국 라이온스 클럽 무궁화 사자대상(1988년), 대한병원협회 중외박애상(1994년), 국민훈장 석류장(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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