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60년대 아시안달러마켓(Asian Dollar Market) 유치 실패다. 68년 미국의 은행들은 아시안달러마켓을 설립하기로 하고 후보지역으로 홍콩과 싱가포르를 올렸다. 이때 홍콩은 외화예금 이자에 대한 원천과세를 고집한 반면 싱가포르는 비과세 등 인센티브를 약속했다. 결국 아시안달러마켓은 싱가포르로 넘어갔다. 홍콩은 뒤늦게 국제금융센터 육성에 치명타를 입었다고 평가하고 82년 원천과세제도를 폐기했다.
둘째는 65년에 닥친 은행 위기였다. 은행에 대한 건전성 감독이 느슨한 데서 비롯된 위기로 홍콩 정부는 78년까지 신규 은행업 인가를 중단했다. 그 여파로 은행 수가 40개로 제한돼 국제 금융센터 입지를 조기에 다지지 못했다.
그러나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면서 발권 은행들은 외화가 아닌 홍콩달러화로 외환기금에 예치했고, 이 과정에서 통화신용이 급팽창했다. 이런 상황은 83년 10월 미국 달러화와 연계된 페그제가 도입될 때까지 계속됐다.
홍콩은 이런 도전을 맞아 시행착오 등을 거쳐 세계적 금융도시로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