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름 잃은 박성훈의 ‘악역사’

머니투데이 조이음(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4.04.24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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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준→윤은성, 본명 잊게 만드는 미친 연기력

사진=tvN사진=tvN


번뜩이는 시선을 마주할 때면 심연까지 꿰뚫을 것만 같다. 제가 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세가, 똑똑한 머리로 막힘없이 쏟아내는 책략이 뱀을 연상시킨다.

tvN 토일드라마 ‘눈물의 여왕’(극본 박지은, 연출 장영우 김희원)에서 윤은성(박성훈)은 오랜 시간 마음에 품어온 홍해인(김지원)을 오롯이 제 손에 넣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사냥하는 뱀의 모습과 흡사하다. 친절한 사람의 얼굴 아래 제 새 새까만 속내를 숨기고 되도록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거리를 좁히고, 목표물이 사정권 안에 들어왔음이 확인된 뒤에야 비로소 본심을 드러내는 것만 봐도 그렇다. 홍해인을 향해 “이혼하라”고 넌지시 권유하고 “네 옆자리 비면, 나는 어때?”라는 가볍게 던졌지만, 이 말들에 담긴 마음의 무게만큼은 전혀 가볍지 않은 고백으로 말이다.



짐작건대 윤은성은 홍해인을 향한 제 감정을 순수한 사랑이라 인지하고 반드시 이뤄내야 할 목표 즈음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학교 동기로 만난 홍해인을 서른이 넘도록 여전히 마음에 품고 있을 리가. 심지어 결혼 3년 차 유부녀인 홍해인의 현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지금껏 홍해인에게 이용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 시간을 피력한다. 홍해인에게 가진 전부를 잃어도 제가 내미는 손을 뿌리칠 수 있겠냐며 협박하는 건 기본이다. 물론 윤은성의 입장에선 제 마음을 알아달라는 처절한 읍소이자 외침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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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윤은성은 재벌 3세로 태어나 평생 물질적 부족함이라곤 모를,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 한번 해 본 적 없을 홍해인과의 완벽한 재회를 위해 그에게 제가 필요할 타이밍까지 계산해 모습을 드러낸 철저한 남자다. 이 같은 성정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 계획 끝에 퀸즈그룹을 제 손아귀에 넣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사이 사람을 필요에 따라 나누고, 쓸모가 다하면 가차 없이 목숨까지 앗아버리는 걸 보면, 성품은 분리수거도 어려운 쓰레기임이 확실하다.

이처럼 일그러진 윤은성의 면면에는 한순간도 응원할 수 없다. 잠시 잠깐 드러난 불우한 서사가 그의 악행을, 비뚤어진 인생을, 악랄했던 모든 결정의 방패가 되진 못한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도 철두철미하고, 대기업 회장도 사로잡는 매력이 오직 사랑 앞에서만은 무용지물이라는 점이, 아무리 재벌들을 사로잡아 줄을 세운다 한들 제 사랑은 사로잡지 못한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받아본 적 없어서인지 사랑만큼은 서툰, 나쁜 남자의 일그러진 순애보를 그 자체로 미워하며(혹은 욕하며) 볼 수 있게 만드는 건 배우 박성훈의 빼어난 연기력에 있다.

극 초반 박성훈은 다정한 듯 다정하지 않고, 차갑지 않은 듯 차가운 모호한 태도를 목소리와 호흡, 얼굴 근육의 미세한 조절 등으로 표현했다. 그 덕에 윤은성은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로 시청자에 궁금증을 안기며 등장했다. 상대에 따라 세밀하게 달라지는 눈빛은 공기의 흐름을 바꿨고, 그의 연기는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충분했다. 드라마가 끝을 향하면서 더는 답을 기대할 수 없을 거라 여겨졌던 윤은성의 일그러진 순애보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듯 소름 끼치고 섬뜩한 납치극으로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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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훈이 연기한 캐릭터 가운데 ‘눈물의 여왕’과 함께 시청자에 관심을 받는 인물은 단연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극본 김은숙, 연출 안길호) 속 전재준이다. 극중 전재준은 학교폭력 가해자로 극악무도한 악행을 일삼는 인물로, 그가 나쁜 행동을 하는 이유는 상세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악랄한 성품을 지닌 뼛속부터 악질적인 상종하지 못할, 단어 그대로 ‘개XX’이자 쓰레기일 뿐. 다만 적록색맹이라는 설정이 있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연진)와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데에서 오는 결핍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제 몸과 마음의 결핍을 저보다 약한 상대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더러운 말을 뱉는 것으로 해결하는 인물이 이해받을 수는 없다. 이 드라마가 공개됐을 당시 시청자들 또한 전재준을 두고 손가락질했지만, 캐릭터를 매혹적으로 완성해 낸 박성훈의 연기에 설득당했을 따름이다.

‘눈물의 여왕’의 윤은성과 ‘더 글로리’의 전재준을 두고 ‘어떤 X이 더 나쁜 X일까요’를 비교하자는 건 아니다. 이야기의 흐름 상 필요에 의해 탄생한 두 명의 나쁜 X을 같은 얼굴로 연달아 마주한 시청자에게 각기 다른 색으로 표현해 낸 배우 박성훈의 연기에 그저 감탄했을 뿐. 뱀처럼 소름 끼치는 윤은성도, 마찬가지로 나쁜 놈이지만 어딘지 허술한 전재준도, 박성훈의 섬세하고 다채로운 연기 덕에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더해졌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드라마에서 악역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는 극의 인기와 더불어 한동안 식당에서 마음 편히 밥 먹기가 힘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곤 했다. 착한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에겐 서비스 음식이 더해지지만, 악역을 연기한 배우에겐 식당 주인아주머니부터 손님들까지 ‘왜 XX이(선한 역의 주인공)를 괴롭히느냐’는 타박과 함께 서슴없이 등짝을 때리곤 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과거 속 이야기지만, 지금도 그때와 같다면 아마 박성훈의 등짝은 한동안 남아나지 않았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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