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거죽만 쓴 짐승의 차이

머니투데이 박창욱 선임기자 | 2012.11.09 12:01

[영화는 멘토다]8. '파괴자들'과 '남영동1985'를 보고

#. 할리우드의 거장 올리브 스톤 감독이 최근 흥미로운 영화 한 편을 선보였다. '파괴자들'. 겉으로 보면 이 영화는 거대 마약조직과 중소 마약조직 간의 다툼을 그린 액션영화다. 또 지적인 남자와 야성적인 남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다는 여성의 판타지도 담고 있다.

어찌 보면 남녀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오락성이 가득하다. 존 트라볼타, 셀마 헤이엑, 베네치오 델토로 등 명배우들의 연기도 볼 만 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마음 한 구석이 괜히 불편해진다. 잔혹한 폭력장면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사회성 짙은 문제작을 많이 만든 올리브 스톤이 그저 그런 오락영화나 한 편 더 만들고 넘어가지는 않았다. 이 영화의 원제는 '야만인들'(Savages)인데, 작가 돈 윈슬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 야만인들은 2010년 출판 당시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그해 최고의 소설 10권에 선정되기도 했다.

영화는 인간의 양면성을 담고 있다. 명문대 출신으로 품질이 우수한 마리화나를 재배해 파는 주인공 벤은 번 돈으로 자선사업을 한다. 그는 평화주의자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오필리아가 멕시코 마약조직에 납치되자 그 역시 살인과 납치를 서슴지 않는다.

멕시코 마약조직의 여자 보스 엘레나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잔혹하게 부하들을 다루지만 반항하는 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늘 애태운다. 사람의 목을 잔인하게 자르는 등 살인을 서슴지 않는 엘레나의 부하 라도와 미국과 멕시코에서 모두 뇌물을 받는 마약경찰 데니스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라며 자신들의 악행을 정당화한다.

재밌었던 영화가 왜 불편했는지 그 이유를 이제 알 것도 같다. 찔려서다. 나도 혹시 야만인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 깊숙한 곳에 야만성이 숨겨져 있다. 그 야만성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밖에 생각하지 않을 때 꿈틀거리고 나와서 자신의 영혼과 행동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2차 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을 지휘한 나치 독일의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을 지켜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썼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통해 지식인이자 자신의 가족을 사랑했던 아이히만이 어떻게 수많은 사람을 죽이게 됐는지 설명했다.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이 조직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아이히만의 경우처럼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않는다면, 특히 비판적인 사고가 없다면 인간은 누구나 스스럼없이 악을 행할 수 있다는 게 아렌트의 지적이다.


오는 22일 개봉을 앞둔 정지영 감독의 문제작 '남영동 1985'에도 바로 아이히만과 같은 인물이 나온다. 감독이 보편성을 갖게 하기 위해 이두한으로 이름을 바꾼 고문기술자 이근안이다. 그는 나라를 위해 '빨갱이'를 잡아낸다는 왜곡된 명분 아래 민주화 운동가인 고 김근태 선생에게 모진 고문을 가했다.

이근안는 당하는 사람의 고통엔 전혀 관심 없이 오직 고문이라는 자신의 직업에만 충실했다. 그는 김 선생의 극중 캐릭터인 김종태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고문으로 한 거짓자백을 뒤집자 엄청나게 분노한다. 고문기술자라는 직업적 자부심에 금에 가서다.

이근안에게 고문 대상자는 사람이 아니라 원하는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대상일 뿐이다. 남의 고통에 무관심한 이런 부류를 바로 '사이코패스'라고 부른다. 이근안 같은 극단적인 경우까지 아니겠지만, 사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종류의 사이코패스는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자신의 욕심을 자신이 몸담은 조직과 사회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숨긴 채, 다른 이들을 서슴없이 괴롭히는 부류들 말이다. 매국노든, 독재자든, 시장지상주의자든 간에 다른 이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이 없는 자들에게 힘이 주어질 때,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 사회는 지난 백 년 간 여실히 겪었다.

자신을 위해 남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짐승들이 사는 정글에 다름 아니다. 남을 해하지 않고도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도모해야 비로소 인간의 사회다. 이제 대한민국도 더 이상 정글 속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 사족.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솝우화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사람과 짐승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사람을 조금만 만들고, 짐승을 훨씬 많이 만들었다가 제우스의 질책을 받는다.

이에 프로메테우스는 짐승들에게 사람의 껍질을 덮어 씌워 사람의 형상으로 만들었다. 그 이후 이 세상엔 원래 짐승이었지만 거죽만 사람의 모습을 한 사람과 원래부터 사람이었던 이들이 섞여 살게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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