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북에서 종각에서 종로5가 땅까지, 강남에서는 양재동 땅에 이르기까지 요즘의 알짜배기 땅을 모두 소유했었다는 피 옹은 구한 말 유명한 거부(巨富)였다. 금아가 6살 무렵, 피 옹이 세상을 떠날 때는 심지어 일본인 대신이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금아가 10살이던 1920년, 모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뜨자 풍족하기만 하던 선생도 부잣집 도련님에서 천애고아 신세로 전락했다. 친척들이 몰려와 선생 집안의 재물과 땅을 모조리 가지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 남은 건 친척들이 생색내듯 건네줬던 바이올린 한 대뿐이었다.
다행히 훗날, 누군가가 부친에게 갚아야 할 돈을 선생에게 직접 가져다줬다. 선생은 이 돈으로 1926년부터 1937년까지 상해 유학을 마칠 수 있었다.
임진호 여사를 만나 가정을 이룬 금아는 슬하에 세영(69)·수영(66) 두 아들과 막내딸 서영(62) 등 세 남매를 뒀다.
맏아들 세영 씨는 일찌감치 예능 쪽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60년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연극부 학생들이 주축이 돼 모인 '실험극장'의 멤버였던 세영 씨는 1967년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 부문을 수상할 정도로 재능을 보였다.
이후 동양방송(TBC) '가요중계실' 디스크자키(DJ)이기도 했던 그는 1960년대 당시 동아방송(DBS)의 최동욱 씨, 문화방송(MBC)의 이종환 씨와 함께 '전설의 DJ'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현재는 캐나다 노스요크에서 치과기공소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미국 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인 막내 서영 씨는 금아 선생의 수필에서 보이는 것처럼 각별한 사랑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금아 선생은 1996년 그의 작품들 중 81편만 추려 엮은 수필집 '인연'에 '서영이'라는 이름의 장을 별도로 뒀을 정도다.
서울대 물리학과 65학번인 서영 씨는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로먼 재키 현 메사추세스공과대학(MIT) 물리학 교수와 결혼해 아들 스테판 피 재키브(23)를 뒀다.
스테판 씨 역시 '가문의 자랑'이다. 미국 유망 연주자들에게 주는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상'을 받은 스테판 씨는 지난달 리처드 용재 오닐, 임동혁 등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한국인·한국계 연주자들과 국내에서 순회공연을 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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