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잊혀지는 숭례문

머니투데이 이백규 부국장 겸 산업부장 | 2008.02.19 12:11

[이백규氣Up] "끝은 시작"...특별법 제정, 문화재의 날 지정해야

칼럼을 쓸 순번이 돼 남들이 다루지 않는 뭔가 다른 게 없을까 이리저리 궁리해봤지만 숭례문 얘기를 피해갈 도리는 없었다.

우리 국민 자존심의 표상, 국보 1호가 많은 국민이 뻔히 바라보는 가운데 허망히 무너져내린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사후 수습 과정에서 우리를 분노케 하고, 실망케 하는 일이 줄을 잇기 때문이다.

 불난 지 1주일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왜 이렇게 법석을 떠는지 모르겠다"든지, "문화재는 복원하면 되지"라고 하는 사람조차 나오고 있다. 소방당국과 문화재청의 책임 떠넘기기는 도를 넘어섰다. 난 불 잡지 못했으니 누가 뭐래도 소방서에 1차 책임이 있을 진대 아직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다.

관리 책임이 있는 중구청과 문화재청도 실패를 직시하고 교훈을 얻기보다는 가리고 덮기에 급급하다.

 그렇다고 해도 노무현 대통령이나 당시 서울시장으로서 숭례문 개방 결정을 한 이명박 당선인의 책임론을 제기하는 것은 정치적 의도를 숨긴 견강부회다.

부끄러운 일이야 덮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지만 제대로 된 사람, 기본이 된 조직은 실패 후 진가를 발휘한다. 자기부정이 없다면 실패의 확대 재생산만 있을 뿐이다.

일본 같았으면 벌써 "내가 조금만 더 신경썼더라면 이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았을 텐데"라며 할복자살하는 사람이 나왔을 판인데 우리는 모두 인정은커녕 은근슬쩍 넘어가려고만 한다.

관계자 개개인의 부실한 기초소양보다 더 눈여겨볼 것은 문화재 방재시스템이다. 안전관리체계에 구멍이 뚫렸는데도 사후 수습 과정을 보면 고작 한다는 게 경찰 수사다.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한 자에 대한 추상 같은 조치와 이를 통한 기강 확립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재난 대책 시스템의 구축이다. 경찰 수사와 별개로 관련 부서는 물론 시민단체와 일반인도 참여하는 민간합동 대책반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9.11 테러사태 당시를 원형 그대로 보여주는 그라운드제로를 가능케 한 미국의 커미셔너(commissioner : 전권을 위임받은 최고감독책임자) 도입도 참고할 만하다.

몇년 전 독일 베를린 배낭여행시 중앙역에서 보이던 반쯤 허물어진 성당 건물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새롭다. 카이저 빌헬름 성당은 2차대전 당시 미군의 공습으로 80m에 달하는 첨탑과 예배당 건물이 반파되자 이를 원형대로 보존하고 인근에 새 성당을 지었다.
 
일본은 1400년된 고찰 호류지(法隆寺)에 큰 불이 나서 많은 국보를 잃었으나 타다 남은 금당벽화 등은 수장고에 보관해놓고 1년에 한번 지금도 공개한다. 일본 전국시대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는 도쿠카와 이에야스와 전투에서 패배한 뒤 혼비백산 도망쳐 성으로 돌아온 후 바지에 똥을 싼 것을 발견하고는 그 황망한 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부족함으로 인한 실패를 잊지 않고 다시는 이런 과오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각오를 본인은 물론 전 사무라이와 병사들 마음 속 깊이 새겨놓기 위해서다. 그때 쉬쉬 하고 덮어버리려 했다면 어찌 됐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숭례문은 파괴됐지만 모든 것을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공무원들의 못된 습관이나 문화재, 안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관행을 뿌리째 뽑기 위해선 당분간 숭례문을 있는 그대로 놔둬야 한다. 좀더 비통해 하고, 분노해야 한다.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문화재와 안전망을 제로그라운드에서 서치라이트 비추듯 속속들이 비춰봐야 한다. 2월10일을 문화재의 날로 지정해 그날의 실패를 두고두고 잊지 말아야 한다.

불타 무너진 남대문은 망각의 대상이 아니라 학습의 대상이어야 한다. 의식 변화와 시스템 재구축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97년 외환위기를 '위장된 축복'으로 승화시켰듯 우리는 또 해내야 한다. 파괴는 창조의 시작이고 끝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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