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태운 일본 군함, 돌연 뱃머리 돌리더니 '쾅' 침몰…수천명 앗아갔다[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민수정 기자 2024.08.24 06:00
글자크기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1945년 8월24일, 강제 징용됐던 조선인 수천 명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사진=KBS 대구 뉴스 갈무리1945년 8월24일, 강제 징용됐던 조선인 수천 명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사진=KBS 대구 뉴스 갈무리


1945년 8월24일, 강제 징용됐다 고향 땅으로 돌아오던 조선인 수천 명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그해 8월18일 패전한 일본은 전범 재판과 관련해 강제노역에 동원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이에 일본 해군을 통해 조선인을 부산으로 송환하라는 명령을 예하 부대에 내렸다.

그렇게 8월22일 조선인 노동자들을 태운 '귀국 1호선' 일본 해군 군함 우키시마호가 일본 북동쪽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에서 출항해 부산으로 향했다.



일본은 4740톤급 우키시마호에 조선인이 3700여명 승선했었다고 발표했지만 한국인 생존자와 유족에 따르면 7000명이 훌쩍 넘는 조선인이 당시에 배에 타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인이 1만 명 이상 탑승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부산항으로 가야 할 우키시마호는 8월24일 오후 5시쯤 항해 중 돌연 뱃머리를 돌렸다. 배는 일본 중부 연안 마이즈루항에 기항을 시도하기 위해 마이즈루 앞바다에 들어왔다.



해안에서 300m 떨어진 지점에 멈춰서자 갑자기 엄청난 굉음과 함께 배가 폭발하며 침몰했다. 항해 방향을 바꾼 지 약 20분 정도 지났을 무렵 발생한 일이다.

일본은 조선인 524명이 사고로 숨졌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 측 발표는 정확한 자료가 아니었다. 승선명부가 아닌 미리 배 탑승을 신청한 사람들의 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사고를 목격한 현지 주민들은 사망자가 적어도 1000여명, 수천 명이 죽었다는 생존자 증언도 나왔다. 사망 처리 되지 않은 실종자도 상당했다.

"기뢰 충돌했다" vs "고의로 폭발시켰다"
일본은 조선인 524명이 이 사고로 숨졌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 측 발표는 정확한 자료가 아니었다. 승선명부가 아닌 미리 배 탑승을 신청한 사람들의 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고를 목격한 현지 주민들은 사망자만 약 1000명에 달한다고 말했으며, 최소 사망자만 수천 명에 달한다는 생존자들의 증언도 있다. 실종자도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사진=SBS 달리 갈무리일본은 조선인 524명이 이 사고로 숨졌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 측 발표는 정확한 자료가 아니었다. 승선명부가 아닌 미리 배 탑승을 신청한 사람들의 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고를 목격한 현지 주민들은 사망자만 약 1000명에 달한다고 말했으며, 최소 사망자만 수천 명에 달한다는 생존자들의 증언도 있다. 실종자도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사진=SBS 달리 갈무리

아직도 정확한 사고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일본은 마이즈루만에 부설돼 있던 미군의 해저 기뢰에 충돌하며 배가 침몰했다고 주장했다. 또 갑작스레 방향을 바꾼 것은 미국 점령군의 명령 때문이었다고 했다.

한국은 일본이 고의로 배를 폭파했다고 보고 있다. 배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 분노한 조선인들이 보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함께 탑승해 있던 일본 해군 장교들이 자폭했다는 것이다.



2016년엔 우키시마호에 대량 폭발물이 선재돼 있었다고 추정되는 일본 정부의 기록물이 발견됐다. 갑작스러운 패전에 배에 남아있던 잔재 폭발물을 처리하라고 일본 정부가 전문을 보낸 것이다.

당시 일본 방위청은 우키시마호 등 3척의 배에 전문을 보내 "출항 전인 배는 출항하지 말고 실려있는 폭발물을 육지 안전한 곳에 격납하고, 이미 출항해 항해 중인 배는 해상의 안전한 곳에 폭발물을 투기할 것"이라고 명령했다.

선체 인양 당시 선체 조사자였던 다무라 게이오는 "기뢰에 맞았다면 철판이 밖에서 안으로 휘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이 경우 철판이 안에서 밖으로 휘어져 있었다"고 말했다. 사진은 게이오가 찍은 선체 바닥이 폭발한 부분./사진=SBS 달리 갈무리선체 인양 당시 선체 조사자였던 다무라 게이오는 "기뢰에 맞았다면 철판이 밖에서 안으로 휘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이 경우 철판이 안에서 밖으로 휘어져 있었다"고 말했다. 사진은 게이오가 찍은 선체 바닥이 폭발한 부분./사진=SBS 달리 갈무리


지난 2019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우키시마호'에는 생존자들의 구체적인 증언이 담겨있었다.

생존자들은 "8월23일 오후 7시쯤 해군병사 둘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밑에서 한 여인이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는데, 해군이 아이를 보면서 '저 불쌍한 어린애가 꽃 몽우리도 피우지 못하고 가게 생겼으니 큰일이다'라고 했다" "일본 해군이 물건을 자꾸 물에 버렸다" "일본 사람들이 보트로 나가는데 몇 명 안 됐다" "보트 타고 내뺀 뒤 '쾅'하고 폭발했다" 등 구체적인 증언을 남겼다.

그 밖에도 기뢰가 폭발하면 물기둥이 치솟아야 하는데 당시엔 그런 물기둥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폭발 소리가 한 번에 그쳤어야 하는데 세 번이었던 점, 선체 인양 결과 배 선체가 모두 바깥쪽으로 구부러져 있었는데 이는 내부 폭발이 일어났다는 증거라는 점 등 다양한 의혹이 제기됐다.



희생자들을 위한 소송, 그러나…
한국인 강제징용자의 철도 노동 모습./사진=독립기념관 홈페이지한국인 강제징용자의 철도 노동 모습./사진=독립기념관 홈페이지
우키시마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의 군사적 요충지 '시모키타반도'에 끌려간 조선인이었다.

군수 물자의 안전한 수송과 보관을 위해 일본 정부는 이곳에 철도, 터널, 부두, 비행장 등 건설 공사를 하기로 결정했는데, 험난한 지형 특성과 악천후 속에서도 조선인은 일해야만 했다.

그러나 고국에 돌아갈 수 있다는 광복의 기쁨도 잠시,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은 강제노역의 시련만을 겪다 이 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92년 침몰 생존자와 유족들은 일본 정부의 안전관리 의무 위반을 문제 삼고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일본 법원에 제기했다.

2001년 교토지법 1심 재판부는 일본의 안전 배려 의무를 인정하며 우키시마호 승선과 피해가 입증된 원고 15명에게 각각 300만엔(한화 약 2757만원)씩 배상하라는 국가배상 명령 판결을 해 원고 측 주장을 일부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검찰이 잇달아 항소하며 결국 2004년 원고 측 패소가 확정됐다.



지난해 1월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 손팻말을 들고 있는 모습./사진=뉴스1 지난해 1월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 손팻말을 들고 있는 모습./사진=뉴스1
지난 6월 우리 정부는 일본에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부를 제공해 달라고 요구했다.

당초 일본 정부는 배 침몰로 인해 승선 명부가 상실됐다고 줄곧 주장해왔다. 그러다 최근 정보공개 청구에 의해 명부 3개가 공개되면서 일본이 기록을 보관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미야자키 마사히사 후생노동성 부대신은 지난 5월 "승선자 등의 '명부'라고 이름 붙은 자료가 70건 정도 있으며, 자세히 조사해 대응하겠다"며 "모두 구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자료로 후생노동성 전신 조직부터 계속 보유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공개한 문서는 사고 후 조사를 거쳐 작성된 명부"라며 "승선자 명부와는 작성 시기가 다른 별개의 것"이라고 해명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