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답은 연구현장에 있다

머니투데이 김유경 정보미디어과학부장 2024.04.17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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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시간 지하철역/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출근시간 지하철역/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출퇴근길 지하철에 서로 먼저 타려고 떠밀던 시기가 있었다. 탑승위치에 줄을 설 수 있도록 기준표시가 생기자 금세 질서 있는 환경으로 바뀌었다. 이같이 모두 공감하는 기준은 상황을 180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역으로 잘못된 기준은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지난해 제대로 된 검증이나 분석 없이 R&D(연구·개발) 예산을 일괄삭감한 게 대표적이다. 정부는 R&D 비효율을 혁파하고 R&D 수준을 높이기 위한 방침이라며 2024년도 국가 R&D예산을 14.7%(4조6000억원) 삭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의 비효율은 개선되지 않았다. 출연연의 근본적인 문제로는 PBS(연구과제중심제도)가 꼽힌다. PBS는 1997년 과학기술처가 도입한 제도로 R&D 과제를 연구기관간 경쟁해서 수주해 연구비를 충당하는 제도다. 당장 급한 인건비(박사후연구원, 학생연구원 등) 마련을 위해 단기 연구과제에 집중하는 등 중장기·도전적 연구의 걸림돌이 됐다. 또한 적당히 성과만 내면 되는 연구과제를 수주하는 문화가 형성되면서 활용성이 떨어지는 R&D 성과물이 쌓였다는 평가다.

국제연구 공조에는 악영향을 미쳤다. 양자 국제공동연구센터와 양자 기술협력센터의 예산을 25% 삭감하면서 해외 공동연구자들의 신뢰도가 떨어진 게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아울러 젊은 연구자들의 인건비가 축소되면서 이들의 동기부여와 사기도 떨어뜨렸다.



4·10 총선을 앞두고 정부는 젊은 연구자들을 달래기 위해 연구생활장학금을 도입하는 한편 내년 R&D예산을 역대 최고수준으로 대폭 증액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총선 사흘 전인 지난 7일에는 대학원 대통령과학장학생 120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그런데 이 역시 기준이 적확하지 않다. 이공계 학생들이 학비나 생활비 걱정을 덜고 학업과 연구에 매진하도록 마련했다는 대학원 대통령과학장학금은 '고스펙' 위주로 선발하면서 연구 양극화만 느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산삭감 여부와 별개로 R&D 비효율 문제는 연구현장에서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다. 개선방안들도 나온다. 2025년 예산심사를 앞두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1차관과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은 "증액과정에서 비효율을 걷어내겠다"고도 강조했다. 다만 현장의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이는 정책이 요구된다. 여전히 현장에서는 일부 필수연구가 소외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카이스트 A교수는 최근 강좌에서 "평가기준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00% 성공하지 않으면 받은 지원금을 반납해야 하기 때문에 현재 대학, 연구기관, 기업 등에서는 정부 연구과제 신청시 절대 실패하지 않을 내용으로 기획한다는 것이다.

A교수는 "실패가 없는 연구에는 대박연구도 없다"며 "시간이 지나면 결과가 나오는 연구과제만 해서는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축적의 시간이 필요한 연구과제들에 대한 장기지원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 평가제도부터 바꿔야 한다는 게 A교수의 제언이다. 30%만 성공해도 성공으로 인정해준다면 원천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연구들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최근 한 출연연이 평가제도를 바꿔 특허활용률을 2배 가까이 높인 사례가 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하 건설연)은 부서장의 평가와 동료평가의 비중을 동일하게 하고 특허활용률 평가제도를 도입하면서 특허활용률을 출연연 평균 38.5%의 2배에 근접하는 63.6%까지 높였다. 아울러 혁신적인 제도 도입에는 구성원들의 참여와 동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건설연은 찾아가는 설명회, 전 직원 공청회 등을 개최하면서 직원들의 의견이 직접 반영될 수 있도록 투표를 실시하고 후속 개정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그간 과학발전에 의지를 보였다. 이제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기준만 잘 잡아줘도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리고 답은 역시 현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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