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로 넘어간 '의대 증원' 바통…통일안 제시, 가능할까?

머니투데이 박정렬 기자 2024.04.02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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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왼쪽)들과 한 의사가 이동하고 있다./사진=[서울=뉴시스] 황준선 기자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왼쪽)들과 한 의사가 이동하고 있다./사진=[서울=뉴시스] 황준선 기자


대통령실이 그동안 고수해 온 의대 증원 '2000명'에 대해 의료계가 합리적인 통일안을 제시하면 조정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처음으로 밝혔다. 의대 증원의 '공'이 의료계로 넘어온 것이다. 의료계 내부에서는 통일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낙관론과 공통된 의견을 모으기 어렵다는 비관론이 엇갈린다. 의료공백의 장기화로 환자의 불안과 고통이 가중되는 상황에 의료계가 직접 '엉킨 실타래'를 풀어갈 것인지 관심이 집중된다.

2일 정부 부처와 의료계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일 '국민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대국민 담화에서 "2000명이라는 숫자는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해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면서도 "의료계가 더 타당하고 합리적인 통일된 안을 가져온다면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고 조건부 협상 가능성을 내비쳤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 불편을 조속히 해소해 드리지 못해 대통령으로서 송구한 마음"이라고 사과하면서 "의료계가 증원 규모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집단행동이 아니라 확실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통일된 안을 정부에 제시해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의사 확충의 당위성을 강조해 오던 온 정부가 의대 정원 규모 조정 가능성을 거론한 건 처음이다. 같은 날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도 한 방송에 출연해 "2000명이라는 숫자가 절대적인 수치라는 입장은 아니다"며 "(의료계가) 합리적인 조정안을 제시해 주면 낮은 자세로 이에 대해 임하겠다"며 윤 대통령의 '유화 메시지'에 힘을 보탰다.

의료계로 넘어간 '의대 증원' 바통…통일안 제시, 가능할까?
의대 증원에 대한 행정절차는 이미 진행 중이다. 지난달 전국 40개 의과대학 중 서울(8개)을 제외한 32개 의과대학에 증원분이 배정됐다. 총정원의 82%에 해당하는 1639명은 비수도권에, 서울을 제외한 경인 지역에 18%(361명)가 증원됐다. 교육부는 각 대학에 다음 달 31일까지 이를 감안한 대입전형 시행계획을 제출하란 공문을 발송한 터라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



의료계에서는 제한된 시간 내에 통일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조윤정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언론홍보위원장은 전날 언론 브리핑에서 "의료계가 통일된 안을 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낙관론을 펼쳤다. 그는 "대한의사협회(의협), 전의교협,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의과대학생 대표들이 끊임없이 대화해왔다"며 "대한의사협회가 신설한 정책분과위원장에 김창수 전의교협 회장을 선출한 것도 상당히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오랜 시간 소통하며 신뢰 관계를 구축한 만큼 얼마든지 하나 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서울 서대문구 연세의료원에서 열린 전국의과대학 교수협의회 기자회견에서 김창수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 총회장의 자료에 의대교수 사직 관련 메모가 적혀 있다./사진=[서울=뉴시스] 정병혁 기자 서울 서대문구 연세의료원에서 열린 전국의과대학 교수협의회 기자회견에서 김창수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 총회장의 자료에 의대교수 사직 관련 메모가 적혀 있다./사진=[서울=뉴시스] 정병혁 기자
반면에 정작 '의료계 대표'를 자처하는 의협은 2000명 증원 철회를 여전히 대화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해 입장차를 보인다. 김성근 의협 비대위 대변인은 윤 대통령의 담화문이 발표된 직후 열린 브리핑에서 "2000명 증원이 지금 문제시되는 필수, 응급, 중증, 소아 의료 위기의 해법이 아니라고 꾸준히 말해왔다"며 "(2000명 증원을) 정해둔 채로 협의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통일안을 제시해달라는 대통령실 요구에 대해서는 "이를 만들어갈 기구를 구성하자는 제안이 대전협 7대 제안에 들어가 있다"며 확답을 피했다. 임현택 신임 의협 회장은 대통령 담화문 발표 후 SNS에 "'입장 없다'가 공식 입장"이라며 통일안 제시, 사회적 협의체 구성 등 윤 대통령의 제안을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사진=페이스북 캡쳐/사진=페이스북 캡쳐
전공의들은 대통령실의 제안에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의협과 전의교협이 전공의와 소통한다고는 하지만, 실제 '선배 의사'가 정부와 협상에 나서도 '후배 의사'인 전공의가 동참할지는 미지수다. 의대 증원 계획의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며 행정처분을 불사하고 병원을 나선 만큼 뚜렷한 '결실' 없이 통일안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사직서 제출과 병원 이탈을 전공의가 개별적으로 결정했고, 이후로 지금까지 뚜렷한 구심점이 없어 통일된 의견을 제시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조석주 부산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정부가 유일한 의료계 법정단체인 의협조차 협상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아 '게릴라식 투쟁'이 전개된 것"이라며 "행정명령을 발동하고 의협 전·현직 간부가 경찰 수사를 받는 상황에 누가 위험을 무릅쓰고 협상 대표로 나서겠느냐"고 반문했다.


의대 증원을 결정하는 데 대한간호협회, 대한병원협회 등 의사 외 의료단체와의 소통도 고려해야 한다. 전공의 집단 이탈이 PA(진료 보조) 간호사 제도화, 의료전달체계 개편 등 다양한 의료 현안 논의의 '방아쇠'로 작용하며 직역 갈등은 한층 첨예해졌다. 의사 업무로 활동 영역을 넓혀가는 간호사, 전공의 고용·수련을 책임지는 병원이 모두 의대 증원에 민감하다. 복잡하게 얽힌 직역 간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섣불리 의사들이 증원 안을 제시했다간 병원 안팎에 새로운 갈등이 촉발할 우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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