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서 촉발한 3·15 의거... '이승만 몰락' 4·19서 타올랐다[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김소연 기자 2024.03.15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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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찢겨진 자유당 정·부통령 선거 벽보/사진=민주화운동사전 사이트 캡처찢겨진 자유당 정·부통령 선거 벽보/사진=민주화운동사전 사이트 캡처


1960년 3월15일, 64년 전 이날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다. 노골적인 4대 대통령과 5대 부통령 부정선거에 맞서 마산 시민(현 창원 시민)들이 분연히 일어난 '3.15' 의거다.

권력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1~3대 대통령 이승만과 그가 속한 자유당은 3월15일,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의 부정선거를 치렀다. 투표 방법부터 개표 방식까지 모두 조작됐던 그들의 선거 방식은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이를 좌시하지 않았던 마산을 시작으로 선거 당일부터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족,민주화 운동으로 꼽히는 3.15 의거다.



3.15 의거는 전국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퍼지는 계기가 됐고 대한민국 최초로 성공한 민주주의 시민혁명, 4.19 혁명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나면서 제1공화국 시대가 막을 내렸고, 이승만도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전국의 학생과 시민들이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을 견디며 이뤄낸 정권 교체라는 점에서 4.19 혁명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리고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된 것이 3.15 의거다.



이승만 전 대통령 양자인 고 이인수 박사가 지난해  4.19 묘역 유영봉안소를 찾아 사과하는 모습/사진=뉴스1 이승만 전 대통령 양자인 고 이인수 박사가 지난해 4.19 묘역 유영봉안소를 찾아 사과하는 모습/사진=뉴스1
대놓고 자행한 3.15 부정선거..선거 당일, 시위 시작됐다


3.15 의거는 3.15 부정선거에 반발해 마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다. 너무나 노골적이었던 탓에 선거 당일, 바로 민주화 시위가 시작됐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1~3대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과, 자유당은 정권을 이어가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앞선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이승만은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던다. 라이벌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유세 중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 아래에서 장관을 수행했던 진보당 조보암에게 30% 가량의 득표율을 빼앗긴 탓이다.

이에 자유당은 4대 대선이었던 3.15 투표에서 부정선거를 준비했다. 집권당인 것을 이용해 선거자금을 기업들에게서 뜯어낸 것은 물론, 4할(40%) 사전투표, 3인조·9인조 공개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조작발표 등 다양한 수법들을 준비했다.

이중 4할 투표는 투표함의 40%를 집권당 표로 이미 채워놓거나, 투표함을 바꿔치기하는 방식이다. 3인조·9인조 공개투표는 선거에 익숙하지 않은 국민들을 지도한다면서 단체로 투표하게 하고 조장이 특정 후보를 미는 방식이었다.

투표장에 나서는 3~5인으로 조를 짜서 이동하는 사람들. 당시 자유당은 경찰과 공무원을 총동원해 유권자들을 3~5인으로 묶어 투표장에 가도록 강압해 반공개투표를 진행했다./사진=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투표장에 나서는 3~5인으로 조를 짜서 이동하는 사람들. 당시 자유당은 경찰과 공무원을 총동원해 유권자들을 3~5인으로 묶어 투표장에 가도록 강압해 반공개투표를 진행했다./사진=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다만 대선의 경우 라이벌인 민주당 후보가 건강상 문제로 갑작스레 서거, 이승만 대통령 단일 후보가 되면서 조작 필요성이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부정선거 타깃은 부통령 선거가 됐다. 부정 투표를 너무 열심히 한 탓에 이기붕 자유당 부통령 후보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100%를 넘어서자, 이를 79%로 하향하는 우스꽝스러운 일도 자행됐다.

이 정도로 노골적인 부정선거가 진행되자, 당일 이를 눈치챈 마산 시민들과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평화적인 시위를 시작한 시민들에 경찰은 최루탄과 총격 등을 퍼부으며 무차별적으로 강제 진압을 했다. 분노한 시위대가 경찰관서와 국회의원, 경찰서장 자택을 습격하면서 충돌은 커졌고,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이에 그치지 않고 시위에 참석했던 마산 학생과 시민들을 잡아들였다.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면서 고문도 했다. 시민들의 반발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진실화해위원회 공식자료에 따르면 3·15의거로 인한 사망자는 16명, 부상자는 43명으로 집계된다.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한 구의 시체, 4.19 혁명 기폭제가 되다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 군의 시신/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산일보 등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 군의 시신/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산일보 등
4월11일, 한 구의 시체가 마산 중앙부두에 떠올랐다. 1차 마산 시위였던 3.15 의거 때 실종됐던 고등학생 김주열 군의 시체였다. 그는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머리가 온전치 않은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됐고, 분노한 시민들의 2차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3.15 마산 의거가 전국적 시위로 확산된 순간이다.

이어 4월18일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들자'는 선언문을 낭독하며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던 고려대학교 3000여명의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가다 습격을 받아 큰 부상을 당하는 입는 일이 발생했다. 연이은 학생들의 봉변에 시민 반발은 더 커졌고 마침내 4월19일 총궐기로 이어졌다. 4.19 혁명이다.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는 시민들 앞에 이승만 정권은 또다시 총칼을 들이댔다. '비상계엄령'도 선포됐다. 그러나 정권의 무력 진압에도 굽히지 않고 시위에 참가하는 군중은 늘어만 갔다.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내려놓고 하와이로 망명,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3.15 의거가 대한민국에 남긴 것
3.15 의거 장면/사진=국립3.15민주묘지 사이트 캡처3.15 의거 장면/사진=국립3.15민주묘지 사이트 캡처
3.15 의거는 국민의 힘으로 정치 권력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일화다.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 재민' 원칙도 다시 확인시켰다.

대한민국이 오늘날까지 민주주의 가치를 유지하고 지킬 수 있는 것도 3.15 의거 정신이 기반이 된다. 시민들이 부정선거에 눈감지 않고 일어선 덕분에 3.15 부정선거도 한국 역사상 유일의 부정 선거로 인정될 수 있었다.

3.15 의거가 민주주의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덕분에 이후 4.19 혁명과 부마민주화운동, 6월 항쟁,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이에 국가는 2010년부터 3.15 의거를 국가 기념일로 지정했다. 옛 마산시(현 창원시 마산회원구)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국립 3.15 민주묘지'가 있다.

다만, 3.15 의거는 한국 현대사 최초의 민주화 항쟁으로 대한민국 국민들 머릿 속에 남았지만, 당시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가해자들은 일부 무죄를 받아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보고서에 따르면 3.15 부정선거를 실행한 신도성 경상남도 지사, 최남규 경남경찰국장은 징역형을 받았지만, 발포 책임자였던 손석래 마산경찰서장과 서득룡 부산지방검찰청 마산지청장 등은 무죄를 받았다. 고문경찰들도 대부분 무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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