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 재판, 당신은 '고릴라'를 보았나?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2024.02.0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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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희의 思見]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인 대니얼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가 1999년 진행한 '선택적 주목 실험(Selective Attention Test) 실험의 한 장면.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인 대니얼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가 1999년 진행한 '선택적 주목 실험(Selective Attention Test) 실험의 한 장면.


일명 '투명 고릴라 실험'이라는 게 있다. 인간이 직접 자기 눈으로 봤다고 확신하는 것이 실제와 다를 수도 있다는 인지 실험이다. 이 실험은 인간의 대표적인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 경향을 보여준다.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인 대니얼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가 1999년 진행한 '선택적 주목 실험(Selective Attention Test, 일명: 투명 고릴라 실험)'은 이렇다.



영상 속에서 6명의 학생들이 3명씩 나뉘어 흰 셔츠와 검은 셔츠를 각각 입고 같은 색의 옷을 입은 사람끼리 농구공을 패스한다. 이 영상을 보는 피실험자에게 흰옷을 입은 사람끼리 몇번 패스를 했는지 세도록 했다. 그리고 흰옷 끼리 패스한 수를 센 피실험자에게 몇번 패스했는지를 물은 다음, "당신은 고릴라(gorilla)를 봤나?"라고 묻는 게 실험의 전부다.



이 실험에선 패스 중간에 검은 색의 고릴라 의상을 입은 학생이 패스하는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들어와 가슴을 두드리며 킹콩 흉내를 내고 퇴장한다. 하지만 피실험자들의 50% 이상은 흰색 팀의 패스에만 집중하느라 고릴라를 못봤다고 답했다.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그 외의 정보는 배제하는 우리 뇌의 선택적 지각을 잘 보여주는 실험이다.



오는 5일로 예정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재판에 앞서 소위 진보적 시민사회단체들은 법원에 '엄벌'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내는 등 여론전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검찰이 공소장에서 언급한 그대로다. '주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사실의 입증이 이뤄지지 않는 얘기들을 그들이 선호하는 언론을 통해 쏟아낸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세계적인 투자가인 워렌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과의 만남을 통해 삼성생명을 매각하려던 중대한 사실을 공시하지 않은 것은 자본시장법 위반이라는 식이다. 이런 주장에 변호인들은 "상견례도 안했는데 청첩장을 돌리는 꼴"이라며 공소사실을 부인하는 재판과정이 이어졌다.

사실 워렌 버핏 회장과의 만남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법위반이라는 주장에 얼마나 큰 왜곡이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관련기사 : 이재용 부회장이 젠틀맨 Mr. B를 만났을 때…). 워렌 버핏과의 한차례 만남 이후 삼성생명 지분 매각은 없었던 일이 됐기 때문에 공개할 이유가 없는 일이 됐다. 구체적인 매각협상은 진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를 알리지 않아 문제라는 말은 억측이다.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농구공, 워렌 버핏을 만난 사실)만 보고, 매각협상이 구체적으로 진행되지 않는 것(고릴라)은 보지 못한 결과다. 이런 '선택적 지각'은 이번 재판에서 끊임없이 이뤄졌다. 검찰의 주장만 들어보면 모든 것이 엄벌에 처해야할 죄로 여겨지지만, 변호인의 변론을 들으면 그 의문점이 모두 해소되는 식이다. 그렇게 3년 2개월간 106차례의 공판이 진행됐다.

일부 단체들은 콜옵션 부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자산재평가 과정을 '자산 부풀리기'라고 말하고, 자사주 매입과정을 주가조작이라고 불렀다. 합병비율은 상장사의 경우 주가로 정해야 한다는 자본시장법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불법이라고 주장하는게 그들이다. 그들의 이념적 지향이 '보고 싶은 것만 보도록'하는 선택적 지각을 불러온 듯하다.

이 재판을 깊이있게 참관해서 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검찰 주장에 대한 변호인들의 반론에 대해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에 빠질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모순된 사실로 인한 인지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 사실과 다른 자기합리화논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검찰의 공소장 내용은 스토리면에서는 거의 완벽한 시나리오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 제일모직의 기업가치를 부풀려 삼성물산과 합병하기 위해 회계분식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 논리의 허점들은 재판과정에서 증거와 증언을 통해 상당부분 드러났다.

그럼에도 인지부조화에 빠진 사람들은 "국가기관인 검찰이 기소했을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겠느냐, 돈을 받고 변론하는 변호인들은 자신들의 의뢰인에게 유리한 증거만을 대지 않았겠느냐"는 자기합리화 과정을 통해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기자가 수십차례 법원을 찾아 결심공판을 포함해 여러 차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혹은 7시)까지 진행된 재판을 참관한 후 느낀 생각이다.

'재벌은 부도덕하다'라는 프레임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죄없는 삼성'은 상상하기 힘들다. 합리적 의심이 배제될 정도의 증명에 이르지 못했음에도, 1심에서 엄벌을 내리라는 주장은 검찰이 던진 농구공만 쳐다보고 그 속의 진실은 외면하는 선택적 지각에 기인한다.

기자 또한 선택적 지각과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다. 그러기 때문에 불편부당한 관점을 갖기 위해 재판 과정을 지속적으로 지켜보고, 검찰과 변호인의 주장에 허점을 찾는 과정을 거쳤다. 그 결론은 이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도 그냥 농구공만 오간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고릴라가 춤을 추고 있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고릴라들은 이번 합병이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에 따라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라는 정부의 강력한 압박에 맞춰 삼성이라는 기업이 생존을 위해 지배구조를 단순화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과정에 대주주의 지배력이 강화되는 면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는 기업이 망가져도 대주주의 지배력만 높이면 된다는 식의 무도한 일과는 다르다.

흰옷과 검은 옷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재판부가 농구공이 수없이 오가는 그 가운데 나타난 검은 고릴라를 보았을 것이라 믿는다. 1심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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