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의 무게를 견딜 자...그 자리를 탐하라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2023.12.2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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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희의 思見]

편집자주 재계 전반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사견(私見)일 수도 있지만, 이보다는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라는 누군가의 에세이집 제목처럼 세상의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자는 취지의 사견(思見)을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찰스3세의 대관식에 썼던 성 에드워드 왕관. 15개 영연방왕국 국가원수의 상징적 왕관이다./사진제공=영국 왕실 홈페이지찰스3세의 대관식에 썼던 성 에드워드 왕관. 15개 영연방왕국 국가원수의 상징적 왕관이다./사진제공=영국 왕실 홈페이지


올 한해 재계는 '왕관(경영권)' 쟁탈전이 더 없이 많은 해로 기억된다.

창사 후 75년 인화(人和) 하나로 이어온 LG 가문에서는 올해 아들을 상대로 어머니와 두 여동생들이 상속합의서에 서명한 후 4년만에 상속재산회복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 측은 표면적으로는 LG 그룹의 경영권에 관심이 없으며 자신들의 몫만 제대로 챙겨달라고 주장하지만, 몰래한 녹취록 속에 드러난 그 속내를 보면 '왕관(경영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다. 구 회장의 모친인 김영식 여사는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가) 아버지를 닮아 경영을 잘 할 수 있다"며 (주)LG 지분을 요구했고, 동생인 구 대표는 "(경영권 지분은 구광모 회장에게 넘긴다는) 구본무 선대 회장의 상속유지를 다시 리셋하자"고 본심을 드러냈다.



또 다른 곳에선 형제자매간 다툼이 벌어졌다. 한국앤컴퍼니그룹(옛 한국타이어그룹)에선 차남인 조현범 현 회장과 3남매(장녀, 장남, 차녀)간 형제의 난이 다시 불거졌다. 이번엔 사모펀드 운용사인 MBK파트너스까지 참전했다. 이 분쟁에선 공개매수 목표치에 미달하면서 판뒤집기는 불발에 그쳤지만 장녀인 조희경 한국타이어나눔재단 이사장이 제기한 조양래 명예회장에 대한 한정후견개시 심판청구 등 여진이 남아있는 상태다.

지난 6월에는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경영복귀를 시도하며 동생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상대로 벌인 주주총회 표 대결에서 아홉번째 패배를 맛봤다. 롯데홀딩스의 최대주주인 일본 광윤사의 1대주주인 신동주 전 부회장에 대해 다른 롯데홀딩스 일본 내 주주들이 동조하지 않고 신동빈 현 회장의 손을 들어준 결과다.



다시 불씨를 피운 경영권 분쟁도 있다. 2021년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을 상대로 '조카의 난'을 일으켰다가 무의로 돌아간 박철완 전 금호석유화학 상무(개인 최대주주)는 최근 금호피앤비화학의 자사주 교환에 반기를 들며 경영권 분쟁의 불씨를 되살리려 했다. 하지만 법원이 자사주 처분은 다른 자산 처분과 마찬가지로 '주주가 이를 무효화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판결해 박 회장 측의 손을 들어줘 경영권 탈환이 쉽지 않은 모양새다.

이 밖에 경영권 분쟁은 아니지만 효성 장남 조현준 회장을 상대로 다수의 소송을 제기했던 차남 조현문 전 효성 부사장과 관련한 강요미수 재판이 이어지고 있고, 최태원 SK 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은 이혼 소송 과정에서 재산분할 갈등을 빚고 있다. 표면적 이유는 다양하지만 이면에는 그룹 경영권과 관련된 갈등이 내포돼 있다.

노 관장은 1조3000억원대 SK 주식을 분할해달라고 청구해 이것이 받아들여질 경우 SK 그룹의 경영권에 큰 영향을 미칠 변수였으나, 1심 재판부는 SK 주식은 분할 재산이 아니라며 위자료 1억원과 재산분할액 665억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노 관장은 이에 불복해 2심을 진행 중이다.


총수가 있는 10대 그룹에서 오너 3세로 승계가 이뤄진 곳 중 현재 경영권 관련 분쟁이 없이 말끔히 정리된 곳은 이건희 회장 타계 후 가족간 합의로 상속이 끝난 삼성그룹 뿐이다.

아직 오너 3~4세로 상속이 완전히 이뤄지지 않은 현대자동차, 한화, HD현대나 집단 지도체제 성격의 GS 그룹은 대부분 후계구도는 완성됐지만 지분구조로는 아직은 미완의 모습이다. 정몽구 현대차 명예회장이나 김승연 한화 회장, 정몽준 HD현대 대주주가 여전히 그룹 최대주주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75년 인화의 LG가 한순간에 경영권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진 것이나 형제, 자매, 숙질(삼촌과 조카)간의 경영권 분쟁을 보면 기업의 왕좌(총수자리)와 왕관(경영권)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깨트릴 정도의 무게를 내포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사실 왕관의 무거움은 물리적 무게보다 훨씬 더 하다. 일례로 영국 왕실의 상징인 444개의 보석이 박힌 성 에드워드 왕관의 무게는 2.3kg에 불과하지만 실제 그 권위는 15개 영연방왕국을 포함해 54개국 연연방에 미칠 정도로 크다. 다이아몬드와 금으로 장식된 보석으로서의 실물적 가치가 아니라 나눌 수 없는 권위의 무게다.

기업의 경영권도 마찬가지다. 왕관이 왕국을 통치하는 상징성을 가지듯이 경영권 또한 기업을 운영하는데 핵심적인 권위다. 그 무게를 견딜 준비와 자신감이 있는 자만이 이를 가질 자격이 있다. 기업 왕관의 무게도 국가의 그것 못지 않게 무겁다. 우리나라에는 대표적인 가족경영의 모범 기업으로 알려진 발렌베리 가문의 한 때 후계자(마르크 발렌베리 사장)도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경영권은 단순한 욕심의 대상이 아니다. 주주와 회사 구성원, 고객들을 아우를 수 있는 리더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갖춰야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왕관의 무게를 견딜 자만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청룡의 해인 갑진년(甲辰年) 새해에는 한국 재계가 가족간 분쟁 없이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모습을 보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사회 모두를 위한 그 왕관의 가치가 더욱 빛나기를 소원한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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