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모조리 살해" 100년전 일본 관동대학살 공문서 발견

머니투데이 박효주 기자 2023.12.25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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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기록한 일본 사마타야현 구마가야 연대구 사령부의 '관동지방 지진 재해 관련 업무 상세 보고서' 표지. /사진=재일한인역사자료관 홈페이지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기록한 일본 사마타야현 구마가야 연대구 사령부의 '관동지방 지진 재해 관련 업무 상세 보고서' 표지. /사진=재일한인역사자료관 홈페이지


일본 간토대지진 직후 조선인 학살을 기록한 일본 공문서가 새로 발견됐다. 이 문서는 "사실관계를 파악할 정부 기록이 없다"는 일본 정부 입장과 달리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학살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될 것으로 보인다.

25일 일본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언론인 와타나베 노부유키씨가 방위성 방위연구소 사료실에서 간토대지진 직후 상황이 담긴 '간토지방 지진 관계 업무 상보'를 찾아냈다.



간토대지진 학살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간토 지방에 일어난 대지진 직후 발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일본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자 여기저기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등 유언비어가 퍼졌다. 이 헛소문으로 많은 조선인이 살해됐다.

보고서에서 조선인 학살 기록은 '행동 개요'에 기재돼 있다. 그해 9월 4일 일본 경찰이 보호하고 있던 조선인 200여 명을 우라와 방면에서 후카가야, 혼조 경찰서까지 자동차로 호송했는데, 낮에 이송하지 못한 조선인 40여 명이 구마가야 각지에서 그날 밤 '살기를 띤 군중에 모조리 살해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향후 참고할 만한 소견'엔 "조선인 이송은 밤을 피해야 한다"면서 "밤이 되면 어두운 곳에서 모두 살해되는 참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내용도 담겼다.

또 사건을 '선인(조선인) 학살', '불상사', '불법 행위' 등으로 묘사했고, 당시 조선인 유언비어와 관련해 "선인은 단 한 명도 습격하지 않았다. 방화도 없었고,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는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인 학살은 사건 발생 후 50~60년이 지나 조사한 현지 연구자들에 따르면 최소 223명~240명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이 중 확인된 희생자 수는 최소 193명, 증언은 있었지만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 수는 30명~47명 정도다. 이번에 발견된 보고서의 40여 명은 이 중 일부로 추정됐다.


문서를 발견한 와타나베는 "이것은 재향군인 관리 업무를 맡고 있던 구마가야 연대구 사령부가 육군성에 제출한 보고서로, 학살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의 관공서 보고서"라면서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는 종류의 공문서"라고 강조했다.

이어 "일본인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조선인 학살을 저질렀을까. 일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집단으로 정신이상을 일으켰다든지 권력에 의한 음모론적인 탄압이라든지 기존 견해로는 100년이 지나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남아 있다"면서 "관점을 해외나 전후 역사와 연결해 자료를 바탕으로 전모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보고서는 일본 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터 홈페이지에서 열람할 수 있다. 재일한인역사자료관 홈페이지엔 와타나베의 해설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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