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bye 2023 l 우리를 뒷목 잡게 한 분노 모멘트4

머니투데이 신윤재(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3.12.1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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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연말 ‘뒷목 잡게 한 안방극장 분노의 모멘트’를 엄선한 적이 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시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드라마의 ‘공공재’로서 가치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계기가 됐다. 물론 작가의 대본집 안에서, 감독의 콘티 안에서 잠자고 있는 작품이라면 개인의 만족 단계에 머무를 수 있지만, 이 작품이 기획과 캐스팅, 촬영과 편집의 단계를 거쳐 대중에게 공개되면 어엿한 하나의 사회적 ‘공기(公器)’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올해도 애끓는 심정과 피를 토하는 결기로 많은 시청자의 뒷목을 잡게 했던 ‘분노의 모멘트’를 선정했다. 지난해 선정된 작품들이 극의 맥락이나 흐름 또는 시청자의 기대를 저버리는 ‘무리수’로 많은 지탄을 받았다면, 올해는 그런 분야에 있어서 ‘거장’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한 마디로 ‘막장’의 세 대모로 불리는 김순옥, 문영남, 임성한 작가의 작품이 거론됐다는 말이다. 이들은 각각의 분야에서 드라마 기존 작법의 틀을 벗어난 괴이한 구성으로 또 한 번 많은 사람을 뒷목 잡게 했다.



TV조선 아씨두리안 한 장면. 사진= TV조선 방송화면 캡쳐TV조선 아씨두리안 한 장면. 사진= TV조선 방송화면 캡쳐


‘아씨두리안’, 시어머니에게 왜 고백하는 건데요

문영남 작가가 인간관계의 비틀림을 탐구하는 작가라면, 임성한 작가는 현생과 전생, 사후세계 등 다른 세계와의 연결점에 집착하는 작가다. 그가 필명을 ‘피비’로 바꿔 TV조선을 통해 선보인 ‘아씨두리안’은 그의 세계관과 함께 당황스러운 전개로 여전한 위용을 뽐냈다.



임성한 작가의 작품들은 ‘암세포도 생명이잖아요’ 등의 독특한 가치관과 빙의나 환생, 동물의 생각 등 범인(犯人)들은 쉽게 생각하지 못할 다양한 설정들을 강조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번 작품에서도 과거 조선의 여인이 현대로 오면서 벌어지는 시대나 문화, 가치관의 차이를 그만의 방식으로 정리했다.

하지만 하나 시청자들을 기함하게 했던 장면은 1회부터 등장했다. 바로 며느리인 장세미(윤혜영)가 시어머니 백도이(최명길)에게 냅다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그것도 단둘이 아닌 여러 가족의 앞에서 시어머니를 여자로서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는 동성애를 포함해 근친간의 사랑을 암시한다는 논란으로 옮겨붙어 제작진이 입장문을 따로 올리는 상황에까지 비화됐다.

결국 이 관계는 극이 진행될수록 뒤로 밀렸지만, TV 주말드라마에서 동성의 고백이 그것도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하는 고백이 방송을 타 임성한 작가의 작품을 다시 찾았던 시청자들은 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SBS 7인의 탈출 한 장면. 사진=방송화면 캡쳐SBS 7인의 탈출 한 장면. 사진=방송화면 캡쳐
‘7인의 탈출’, 이 세상 드라마가 아닌 ‘죽음의 섬’



막장의 세 대모가 꾸준하게 안방극장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극적이고 그만큼 항의도 많이 받지만, 시청률에서는 방송사에 이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3년은 성적도 시원치 않아, 진정한 의미의 ‘용퇴’ 희망을 줬다.

김순옥 작가의 SBS ‘7인의 탈출’은 상반기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tvN ‘판도라:조작된 낙원’이 3~4%대의 초라한 시청률로 막을 내린 후 다시 김순옥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작품이라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더욱 극한을 향해 치닫는 설정과 1차원적인 인물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우연과 우연이 겹쳐지는 ‘운명론적’인 구성을 선보였다.

물론 6~7%의 시청률로 김순옥 작가치고는 굴욕을 맛봤음은 물론이다. 그중 5, 6회에 걸쳐 펼쳐진 ‘죽음의 섬’ 에피소드는 그 괴이함의 극치였다. 방다미(정라엘)와 그의 아버지 이휘소(민영기)의 죽음으로 보이는 전개 후 시간이 지나 한 곳에 모인 ‘7인의 공범’들은 이휘소가 ‘버전업’한 매튜리(엄기준)가 설계한 죽음의 섬에 갇혀 지옥도를 본다.



드라마는 판타지, 고어, 호러, 크리쳐 등 지금 한국 드라마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지옥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회차들에 19세 이상 관람가를 붙인 것은 물론이다. 빈곤한 전개는 그렇다 치자, 자극의 강도만 최대치로 올려봤자 그 공간은 공허만이 자리할 뿐이다.

TV조선 빨간풍선 한 장면. 사진=TV조선 방송화면 캡쳐TV조선 빨간풍선 한 장면. 사진=TV조선 방송화면 캡쳐
‘빨간풍선’, 중요한 건 꺾여버린 시청자의 마음



김순옥 작가가 자극의 역치를 탐구하는 작가라면, 문영남 작가는 인간관계의 비틀림을 탐구하는 작가다. 그래서 김순옥 작가의 작품은 독한 고량주 같지만 금방 휘발하는 반면 문영남 작가의 사상은 꽤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연초 막을 내린 TV조선 ‘빨간풍선’은 문영남 작가 특유의 인간군상과 함께 친구의 삶을 질투한 나머지 친구의 남자까지 탐내는 한 여자의 서사를 담았다. 결국 조은강(서지혜)은 친구 한바다(홍수현)의 남편 고차원(이상우)을 홀려 이혼하게 하고, 친구에게 상간녀 소송까지 당했다. 그러나 바다는 은강을 용서했으며, 은강과 차원이 재회하는 열린 결말로 ‘불륜미화 엔딩’이라는 혹평이 쏟아졌다.

피는 못 속이는지 그의 동생 조은산(정유민)도 지남철(이성재)과 불륜을 저질렀는데, 그와의 작별인사에서 건넨 “중꺾마…”라는 대사는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나름 은산이 MZ세대라 줄임말을 잘 쓴다는 설정을 가진 문 작가의 복안이었던 듯한데, 불륜커플이 쓰기에는 애초에 이상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 감정에서 ‘중꺾마’가 등장하는 것은 당시 이 단어의 인기에만 기댔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웠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었겠지만, 정말 ‘중요한 건 시청자들의 꺾여버린 마음’이었다.

SBS 법쩐 한 장면. 사진- 방송화면 캡쳐SBS 법쩐 한 장면. 사진- 방송화면 캡쳐
‘법쩐’, 정의의 사도가 보인 지독한 아이러니



SBS 드라마 ‘법쩐’은 다른 무엇보다 주인공의 처지가 현실에서 극명하게 바뀌어버린 모습 때문에 큰 씁쓸함을 남긴 작품이 됐다. 상반기 막을 내린 작품은 ‘법’과 ‘돈(쩐)’에서 대한민국을 집어삼키려는 카르텔에 맞서 ‘돈장사꾼’과 ‘법률기술자’의 공조를 다뤘다.

배우 이선균은 이 작품에서 돈장사꾼 은용 역을 맡았다. 그 스스로도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정해놓은 선은 지키는 인물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깊이 따르던 윤혜린(김미숙)의 죽음 이후 각성해 카르텔과 싸운다. 그는 막바지에 “법으로 심판하는 건 의미없어. 감옥에 몇 년 살다 와봤자 몸만 조금 불편할 거고 감옥에 다녀와도 그들이 가진 것들이 여전하다면 모든 것들이 똑같이 반복될 거야”라고 일갈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운명을 알았을까. ‘법쩐’ 종방 정확하게 8개월하고도 17일 후인 지난 10월28일 이선균은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서의 포토라인 앞에 서고 말았다. 혐의는 마약 투약이다. 그는 유흥업소를 통해 안 지인을 통해 마약을 구하고 투약한 혐의를 받고 있다. 드라마 안에서 누구보다 득의양양했던 얼굴은 현실에서는 누구보다 움츠러들고 초라한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



아직 수사결과나 재판결과가 나오지 않아 속단할 수 없으나 우리가 ‘법쩐’에서 본 은용의 모습과 현실의 이선균 모습은 나란하지 않았다. 그의 초라한 뒷모습이 어떤 드라마보다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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