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대 높은 독일 뚫었다…'바람' 올라탄 이곳 "韓, 시장 절반 잡을 기회"

머니투데이 권다희 기자 2023.09.27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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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제로 프론트라인]선회 베어링 제조업체 신라정밀 최돈관 대표 인터뷰
미중 무역분쟁으로 중국산 베어링에 관세 부과→韓 기업 美 점유율 확대
우크라이나 전쟁 후 공급망 병목, 한국 풍력 공급망 기업에 기회

편집자주 '온실가스 순배출량 제로(넷제로)' 중간 목표 시점인 2030년을 앞두고 전세계 정부·기업들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왜'에서 '어떻게'의 단계로 접어든 넷제로 추진은 에너지 전환, 산업, 수송 등의 전방위적 변화를 수반합니다. 광범위한 변화의 한가운데 있는 만큼 다양한 시각과 정보가 혼재합니다. 넷제로 달성과 관련해 가장 전방에 있는 각국 기업·기관의 인물들을 만나 합리적인 달성 방법을 고민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전달합니다.

최돈관 신라정밀 대표/사진=권다희 기자 최돈관 신라정밀 대표/사진=권다희 기자


'산업의 쌀'. 기계산업의 핵심 부품 베어링의 별칭이다. 크기는 작으나 제조업 경쟁력의 필수 부품이란 의미가 담긴 명칭이다. 독일 셰플러·일본 NTN 등 전통적인 제조업 강국에서 각 국가를 대표하는 베어링 대표 기업이 있는 것도 기계산업에서 차지하는 이 부품의 중요도를 보여준다. 중국이 천마베어링(TMB) 등 베어링 전문 국영기업을 국가 정책 차원에서 육성한 배경이기도 하다.

베어링의 한 종류인 선회 베어링(slewing bearing)은 무거운 하중을 견디는 굴삭기, 터널을 뚫는 보링 머신, 탱크·장갑차 등 산업 전반에 쓰인다. 한국에서 이 선회 베어링을 대표하는 기업이 신라정밀이다. 1986년 설립된 신라정밀은 국내에서 처음 선회 베어링을 설계·생산했다.



업력 약 40년의 신라정밀이 최근 가장 주력하는 분야가 풍력발전기용 베어링이다. 현재 매출의 약 75%가 풍력산업에서 나온다. 한국에 풍력시장이 형성되지 않았음에도 이런 포트폴리오가 가능한 건 매출의 약 80%가 수출에서 나와서다. 전세계 풍력발전 베어링 주요 기업이 8개 남짓인데, 신라정밀은 이 중 하나로 중국 제외 전세계 시장의 약 7%을 점유했다. 특히 지난 2019년 독일 육상풍력 터빈 제조업체 에너콘에 부품을 공급하는 첫 비(非)유럽 기업이 됐다. '명품 터빈' 제조업체로 불리는 에너콘은 부품사에 대한 품질 요구 수준이 매우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이 기업이 블레이드 베어링 같은 중요 부품 공급처로 비유럽 기업을 택했다는 건 업계에서 이례적인 일로 받아 들여졌다.

신라정밀은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덴마크 베스타스 등 다른 핵심 터빈 제조업체들에도 베어링을 공급 중이고, 한국 천안 공장 외에 브라질·중국에 생산 거점을 뒀다. 전세계 풍력 공급망 변화를 어느 기업 보다 직접 체감하는 환경이다. 베어링이 산업 전반에 쓰이는 부품인 만큼 제조업의 패러다임 변화도 고스란히 감지한다. 최돈관 신라정밀 대표를 21일 경기도 판교 사무실에서 만나 전세계 풍력산업 현황에 대해 들었다.



제조업 패러다임 변화…풍력발전용 베어링 시장 급성장
-신라정밀이 만드는 선회 베어링과 풍력발전기용 베어링 시장에 진출한 계기를 설명해 달라.

▶베어링의 최대 수요처는 자동차 산업이지만 최근 산업 전반에 변화가 있다. 고속 회전 위주인 자동차용 베어링의 경우, 전기차 시대가 돼 내연기관이 빠지면서 전체 자동차에 들어가는 베어링 개수가 약 반으로 줄었다. 자동차용 베어링을 주력으로 하는 기존 베어링 대기업들은 매출이 위축되는 상황이다. 반면 산업 전반에 쓰이면서 하중을 버티는 용도의 선회 베어링이 부상 중이고, 이 선회 베어링의 최대 수요처 중 하나가 풍력발전기다. 한국에서는 조선업이 활황일 때 조선용 베어링 수요가 많았다가 벌크선·바지선 등의 생산이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선박 크레인용 베어링 수요도 덩달아 줄었다. 글로벌 베어링 시장에서 대기업이 덜 진입한 틈새시장을 찾아야 했고, 그래서 2000년대 들어 풍력발전용 베어링에 집중했다. 기존 자동차용 베어링에 집중하던 유럽 대기업들은 포트폴리오를 갑자기 바꾸기 어려운 상황이고, 앞서 풍력 부문에서 업력을 쌓아 왔던 기업들에게 기회가 더 늘어나는 국면이다.

-GE와 협력하면서 본격적으로 풍력터빈 시장에 진출했다.


▶풍력발전기에 들어가는 선회 베어링 수명은 보통 25년인데, 발전기 설치 후 약 15년 시점에 발전사에서 발전기의 베어링만 교체를 하는 교환 수요가 있다.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은 이 교환시장에 2004년 진출했다. 이후 미국 터빈 제조업체인 GE가 미국 밖에서 공급망을 만들 때 교환시장에서 업력을 쌓던 신라정밀을 만났다. 미국은 유럽에 비해 제조업 기반이 약하다. 설계한 터빈의 부품 공급망을 미국 내에서 구할 수 없었던 GE가 한국에서 제조 파트너를 찾았다. 2008년 천안에 국내 첫 풍력발전용 선회 베어링 공장을 세웠다. GE가 설계 및 양산 기술, 공장 생산라인에 대한 감리·감사 컨설팅을 제공했다. GE에 베어링을 공급하면서 풍력시장에서 트랙레코드를 쌓았다.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높은 유럽 시장에도 진출했다. 특히 독일 에너콘은 비유럽 부품을 안 쓰는 걸로 유명한 기업인데 공급을 시작했다.

▶미국과 다르게 유럽은 풍력발전 제조업 공급망이 자체적으로 구축 돼 있다. 게다가 독일 기업들은 엔지니어링 부문에서 콧대가 높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발전사들이 발전 단가를 계속 낮춰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터빈사들의 원가 경쟁 압박도 커졌다. 소재 및 부품에 들어가는 비용을 낮춰야 하는 압력이 커지면서 에너콘 같은 기업도 자국 내 부품만으로 조달 채널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신라정밀 제품의 경우, 한국에서 만들어 독일에 도착하는 가격 기준으로 유럽산 베어링 보다 가격 경쟁력이 있었다. 가격 경쟁력이 있는 상황에서 기술도 인정 받았다. 신라정밀이 설계·제작한 제품을 에너콘이 테스트 했는데 결과가 잘 나왔다. 처음에 배타적이다가 품질이 만족스러우니 태도가 바뀌었다. 2019년 처음 공급을 시작해 현재 에너콘에서 만드는 3~6메가와트(MW)급 최신 모델 베어링 약 50%를 공급한다. 나머지는 독일 베어링 기업이 공급한다. 독일 기업이 거의 전량 갖고 있던 물량을 절반가량 가져 온 거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주요 공급업체가 됐다.

콧대 높은 독일 뚫었다…'바람' 올라탄 이곳 "韓, 시장 절반 잡을 기회"
한국 풍력 베어링 기업들 세계 시장 점유율 14%→50%까지 확대 가능
-10여 년 사이에 글로벌 풍력발전 시장이 급성장했다. 이 기간 글로벌 풍력시장을 주요 플레이어로서 직접 겪었다.

▶풍력발전의 비교 발전원은 결국 화력발전이다. 킬로와트(KW)당 발전 비용이 화력 발전대비 비슷하거나 낮아야 한다. 그래서 발전사들이 규모의 경제와 더 큰 규모의 터빈을 원했고, 터빈 제조사들은 더 큰 터빈 개발에 몰두했다. 풍력 터빈이 너무 빨리 커졌고, 비용 낮추기 경쟁이 가열됐다. 이 흐름은 풍력산업의 공급망 병목을 야기했지만 동시에 유럽 기업에 비해 원가 경쟁력에서 앞서 있는 한국 기업에게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특히 풍력발전용 선회 베어링은 설비 투자 규모가 크다. 더 큰 터빈에 적합한 베어링을 만들기 위해 설비 투자를 계속해야 하는데 수주를 많이 받아야 이후 개발할 투자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이 타이밍을 놓치면 다음 단계에 진입하기 전 시장이 이미 닫힌다.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투자해 자산 회전율을 빠르게 가져가고 확장을 하면서 기술을 개발 하는 속도전이 현재 공급망에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지금은 육상풍력이 대부분이지만 해상풍력 발전이 주력이 됐을 때 별도의 해상풍력용 생산라인을 구축해 놓은 기업만 살아 남을 수 있을 거다. 현재 글로벌 톱티어 풍력 베어링 기업으로 분류되는 유럽과 한국기업들 약 7~8곳 중 70%는 이 투자 속도를 감당할 수 없어 도태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원가 경쟁력에서 앞서 있는 중국 베어링 기업과의 경쟁은.

▶중국 베어링은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을 갖고 있다. 선회 베어링이 제조 산업 전반에 쓰이다 보니 국가가 전략적으로 육성하려고 국영화했다. 천마 베어링 등 전세계 풍력 시장의 40%를 장악한 베어링사는 중국 국영 기업이다. 정부가 자금 조달을 해주고 단조 기업, 제강사가 베어링 기업 내에 수직계열화돼 있어 원가만으로는 경쟁이 안 된다. 그럼에도 한국 베어링 기업이 풍력시장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일차적 배경은 미국 시장이다. 미중 무역분쟁으로 2018년부터 미국으로 수출되는 중국산 베어링에 25%의 관세가 붙기 시작했다. 중국 베어링의 가격 경쟁력이 최소한 미국 시장에서는 사라졌다. 미국보다 중국산에 대한 규제가 느슨했던 유럽도 우크라이나 전쟁 후 공급망의 대중 의존도를 줄이려는 움직임이 빨라졌다. 산업에 따라 대중 견제의 정도가 다른데 풍력을 포함한 에너지 부문에 대해서는 가급적 중국산을 덜 쓰려는 정책적 의지가 강하다. 이 결과 중국 터빈 공급망과 비중국 시장의 공급망 이원화가 빨라지고 있다.

-최근 오스테드의 미국 해상풍력 사업 관련 예상 손상 발표 등 우크라이나 전쟁 후 풍력산업에 누적된 리스크들이 현실화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후 인플레이션 상황이 현실에 나타나는 것 같다. 통상 프로젝트 착공 3년 전 비용 견적을 내는데, 당시의 비용과 현재 시공 시점의 비용차가 너무 커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 기업들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현재 공급망에서 문제가 되는 기업들이 대체로 유럽 기업이기 때문이다. 공급망 병목과 비용 인상 문제가 계속되면, 유럽 터빈사들 입장에서는 유럽에서 터빈을 생산해 시장이 요구하는 가격을 맞추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을 더 하게 될 것이다. 결국 터빈 가격을 낮추면서 대량 양산할 수 있는 생산 거점을 찾아야 한다. 동북아시아, 그중에서도 제조 기반이 있는 한국이 유력한 생산 거점이 될 수 있다.

-급변하는 풍력시장에서 유럽 기업과 비교해 갖고 있는 경쟁 우위를 키우려면.

▶현재 중국을 제외한 풍력 베어링 시장은 독일 등 유럽 기업들과 한국 기업 두 곳 등 약 7~8개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시장 변화로 인해 한국 기업들이 보유한 기술 대비 원가경쟁력의 강점이 유럽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부각 될 수 있다. 중국을 제외한 풍력 베어링 시장에서 약 13~14%를 한국 기업 두 곳이 점유하고 있는데, 이 비중이 중기적으로 약 50%까지 확대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유럽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품질 관리를 잘 하는 게 핵심인데, IT 기반으로 생산기술을 효율화하는 역량은 유럽보다 한국이 앞서 있다. 다만 최근엔 한국도 생산원가가 높아져 베트남이 생산거점으로 부상 중이다. 신라정밀도 베트남에 생산 시설 설립을 검토 중으로, 올해 착공·내년 준공해 2025년께 육상풍력 발전용 베어링 생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한국에서 설계·기술 및 생산관리·마케팅 등을 하고 생산은 베트남에서, 소재 공급은 중국에서 받는 일종의 삼각 무역 형태가 정착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콧대 높은 독일 뚫었다…'바람' 올라탄 이곳 "韓, 시장 절반 잡을 기회"
잠재적 생산거점 베트남 부상 주목

-풍력 공급망 생산 거점으로서 한국이 극복해야 할 부분은.
▶한국의 경우 풍력 공급망 제조업의 펀더멘털을 형성하는 정량적 지표는 매우 좋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터빈 제조사 입장에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 터빈 가격을 떨어트리려면, 3~5년치 발주물량인 약 1000대 정도를 양산·공급할 수 있는 생산시설을 구축해야 한다. 이 생산시설을 우선 한국에 세워 비용을 더 절감하고 보편화해 아시아 다른 지역에도 적용하겠다는 게 글로벌 터빈사들의 구상일 수 있다. 그러나 풍력산업 관련 한국의 정책·규제의 불확실성이 유럽·미국 기업들의 한국에 대한 투자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될 수 있다. 한국 내 해상풍력 시장 형성이 지연될 가능성으로 이어지면서다. 아직 초기단계이기는 하지만 베트남이 풍력 공급망 생산거점으로 서서히 부상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베트남 정부가 자국 재생에너지 육성에 공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정부는 자국 제조업을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으로 변모하려 하는데, 화력발전으로 생산된 제품에 무역장벽이 높아지는 추세라 중화학 공업 발전에 필요한 전력 공급을 재생에너지로 공급하기 위해 재생에너지 육성을 동시에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풍력터빈사 입장에서는 저렴한 토지비용, 두터운 청년층 인구 등 중국의 대안으로 베트남이 갖고 있던 본래 장점에다 베트남의 풍력시장 성장 잠재력도 감안하게 된다. 베트남 정부가 해외 풍력 기업들에 대한 규제도 많이 없앴다. 유럽·미국계 터빈사가 한국을 건너 뛰고 베트남에 아시아 생산거점을 만들려는 유인이 커질 수 있다.

-신라정밀은 생산거점으로 베트남을 검토 중이고, 유럽 터빈 제조기업들은 한국 등 아시아 국가를 생산거점의 하나로 모색 중이다. 전세계 지정학·지경학 변화와 밸류체인 각 층에 속한 기업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공급망이 전세계적 차원에서 재편되고 있다. 이 시기에 한국 안에 경쟁력 있는 풍력산업 공급망을 갖추는 데 필요한 요소는.
▶풍력산업은 소재, 부품, 터빈 OEM, 개발사 등 긴 공급망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에 본격적인 풍력산업이 형성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특히 중소기업 위주인 소재·부품 기업들이 풍력용 제품을 본격적으로 생산·공급할 기회를 갖지 못 했다. 이를 위해 한국 내 풍력단지의 경우 국산화율 비중을 유연하게 도입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브라질처럼 국산부품 사용 요건(Local Content Requirements·LCR)을 과도하게 적용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단조 등 소재 부문의 경우 시장에만 맡기면 중국과의 가격 경쟁이 불가능한 게 현실이란 점도 고려해야 한다. 전체 한국 풍력산업 수요 중 일부는 국산 쿼터를 두는 등의 방식으로 한국 소재 기업들이 생산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만들어 줘야 한다. 현재 중국 소재 가격이 한국 보다 약 25% 정도 저렴하다. 한국 소재기업들이 투자해 생산성을 높일 기회를 줘서 이 격차를 10% 미만으로 낮출 수 있다면 한국 내 자체적이고 전반적인 공급망 구축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풍력은 에너지 산업이고,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도 역내 자체적 공급망 구축이 중요하다.

※최돈관 대표는
△2021~신라정밀 대표 △2012 ~ 신라정밀 상무이사 등 △2009~해피포인트 멤버십 총괄 대표△2006~SK커뮤니케이션즈△2003~KT하이텔 △건국대 산업디자인 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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