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YPC, 유니버설뮤직
이런 질문이 나올 걸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신곡 'Feeling Of You'에선 '위대한 탄생'의 기타리스트 최희선과 키보디스트 최태완 두 멤버가 연주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오지도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며 아등바등 살지 말고 주어진 지금을 소중히, 자신을 느끼며 살자는 긍정의 메시지를 담은 이 곡은 스웨덴 작곡가 디드릭 토트(Didrik Thott)와 니클라스 킹스(Niclas Kings)가 조용필과 함께 만들었다. 10년 전 'Hello' 때와 같은 송캠프 방식이다. 특히 디드릭 토트는 태민, 있지(ITZY), 보아, NCT127, 레드 벨벳 등과 작업한 인물로 그의 건강한 텍스처는 클럽 음악에 강한 니클라스의 그루브를 만나 조용필의 신곡이 케이팝을 담보한 클럽으로 무난히 갈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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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다시 '왜 조용필이 젊어져야 하는가'를 묻고 싶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그 방향이 꼭 트렌디 장르를 향해야만 가능한 것인가를 나는 겹으로 묻는다. 그가 과거 여러 장르들을 건드렸던 건 역설적으로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함이었기에 더 그렇다. 결국 그것은 성공했고 그것이 남녀노소 대중을 열광케 했다. 조용필 음악의 힘은 실험과 도전에 있는 게 아니다. 스타일과 장르는 대중에게 가기 위한 길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지는 아니었다. 그가 장수했던 건 의외로 그의 음악에 내재한 보편성 때문이다. 슬픔을 슬픔으로 씻어내고 고독을 고독으로 밀어내던 그 서럽던 공감 능력, 치유력이 바로 조용필 음악의 가치요 인기 비결이었다. 그리고 그 음악의 기준은 언제나 조용필이라는 사람이었다.
물론 13, 16집 등 그는 일찌감치 해외 음악가, 스태프들과 작업한 적이 있기에 송캠프 같은 요즘 형식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건 아니다. 나는 지금 작곡가 크레디트 제일 뒤에 있는 조용필이라는 이름이 창작의 주체라기보단 명분이나 당위로서 더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관해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조용필만의 색이 바랠 여지가 많아진다. 그러면 좀 어떠냐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우린 조용필의 음악을 듣고 있다. 아이돌 그룹의 데뷔 싱글이 아니다. 적어도 데뷔 55년 차 뮤지션의 음악이라면 자신만의 시그니처라는 게 얕게나마 감지되게 마련인데 이번 신곡들에선 그게 많이 아쉽다는 게 내 질문의 핵심이다. 그래서 이건 딱히 장르 문제도 아니다. 데이비드 보위가 포크를 하든 재즈를 하든, 앰비언트에 파묻히든 그건 언제나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이었다는 사실, 나는 지금 그 지점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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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트렌드란 개성과 대척인 역설적 개념이다. 남이 하는 걸 하고 남과 비슷해야 돋보인다. 따르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아 그것이 만드는 이에겐 은근한 강박이 된다. 지금 조용필은 트렌드와 거듭남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닐까. '라'가 벌써부터 11년 전 모 걸그룹의 곡과 유사성을 비교당하고 있는 건 무얼 말해주는가. 기존 것을 지키는 일이 마냥 멋스러운 게 아니듯, 그걸 벗어나는 것에 집착하는 일도 그렇지 않긴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AC/DC 같은 고집을, 유투나 브루스 스프링스틴 같은 사회 참여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냥 조용필 하면 떠오르는 소소한 것들, 이를테면 묵직한 사색('킬리만자로의 표범')이나 고독('바람의 노래'), 아픔('허공'), 잠시 숨 돌리게 하는 해방감('여행을 떠나요') 같은 것이다. 그나마 '찰나'와 '세렝게티처럼'엔 그런 게 부분이나마 있었는데 이번엔 아예 본질을 놓고 스타일만 좇은 듯해 아쉽다. 그만이 할 수 있고 들려줄 수 있는 영역을, 가령 작사가 최은정/박주연과 함께 열어젖힌 12집의 감동적인 도입부('추억 속의 재회'와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를 기대하는 건 이젠 무리인 것인지. 적어도 시대에 뒤떨어지는 걸 걱정하는 일은 시대를 지배했던 사람의 몫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조용필이 시대를 앞서고 세련됐던 건 43년 전 1집과 32년 전 13집 때였다. 그의 커리어에서 '단발머리'의 반주와 '한오백년'의 가창보다 더 파격적이었던 적이, '꿈'보다 더 세련된 사운드를 들려준 적이 어디 있었나. 조용필의 전성기를 빛낸 양인자라는 이름이 아직 보이던 18집 이후 20년이 흐르는 동안 조용필이 발표했고 발표할 앨범은 단 두 장. 모르겠다. 그의 '젊어진' 음악에 환호하는 건 각자의 자유이지만, 적어도 강산이 두 번 변할 동안 그의 음악이 '세대를 어울렀느냐'면 글쎄, 나는 회의적이다. 잊으면 안 된다. 장르와 세대를 어울러 슈퍼스타가 된 조용필이다. 'Feel Of You'와 '라' 같은 음악을 본인이 하고 싶었을 수는 있지만 그걸 반드시 조용필이 할 필요는 없었다. 트로트와 국악을 등지는 게 능사는 아니다. 지금 조용필이 챙겨야 할 건 콜드플레이 같은 신스/스페이스 팝과 아쿠아(Aqua)풍 유로 댄스를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다른 쪽엔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와 '고추잠자리', '친구여'와 '어제 오늘 그리고'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연주자로서도 좋지만 '남겨진 자의 고독'을 쓴 작곡가 최태완을 더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20집의 나머지 곡들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