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감 넘치는 작품 5개의 '짬뽕' 길복순…그래도 이런 재미 못 참지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에디터 2023.04.04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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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금평의 열화일기]

기시감 넘치는 작품 5개의 '짬뽕' 길복순…그래도 이런 재미 못 참지


넷플릭스 화제작 '길복순'은 잠시 한눈팔면 아까운 장면 놓치기가 부지기수다. 말맛도 살아있는 데다, 진지 모드에 코믹을 얹는 색다른 컬트식 구성도 눈길을 끈다. 보다 보면 밑도 끝도 없이 집중하지만, 자막이 올라가는 순간 비로소 깨닫는다. "아, 어디서 많이 봤던 장면들인데."

재미의 본류가 기시감 작품의 오버랩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의 조합은 식상하면서도 그럴듯하다. 어쩌면 그렇게 섞인 종합선물세트 같은 장면이 감동이나 의미를 삭제한 채 재미 그대로의 재미만을 선사하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기시감 장면들은 어떤 영화에서 만났을까.



아래 5개 작품들은 모두 '킬러'를 주인공으로 한다. 킬러를 소재로 한 더 많은 작품들에서도 연상되는 '무엇'이 있겠지만, 일단 아래 작품들로만 비슷한 구석을 짚었다.

기시감 넘치는 작품 5개의 '짬뽕' 길복순…그래도 이런 재미 못 참지
① 킬빌1(2003)=첫 장면부터 바로 연상되는 작품이다. 오다 신이치로(황정민)가 일본 무사로 나오며 '사무라이 정신'을 강조하는 장면이나, 400년 전 막부의 최고 도공 아키히로의 칼로 길복순(전도연)과 대결하는 장면이 그렇다. 킬빌의 주인공 우마 서먼은 일본에 방문해 깨지지 않는 칼을 만드는 핫토리 한조를 만나 그 칼을 결국 손에 넣는다.



길복순, 아니 킬복순은 킬빌의 주인공처럼 정통 사무라이와 대결하지만, 결과에 이르는 과정은 사뭇 다르다. 다만 빌이라는 우두머리를 제거하는 것이 킬빌의 최종 목표인 것처럼, 길복순도 결국 우두머리와 만나는 복선을 이 장면을 통해 미리 확인할 수 있다.

기시감 넘치는 작품 5개의 '짬뽕' 길복순…그래도 이런 재미 못 참지
② 미스터&미세스 스미스(2005)=역대급 비주얼 스타인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가 주인공으로 열연한 작품.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이 작품은 두 스타 킬러가 서로만 킬러인 줄 모르고 극중 부부가 돼 함께 있을 땐 생활인으로, 나머지 시간엔 킬러로 활동하는 얘기를 그린다.

함께 사는 집은 화려하고 눈부시고 아름답고 행복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맞는 게 없다. 음식 취향도, 취미도 달라 시간이 흐를수록 부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만 쌓인다. 길복순은 화려하고 눈부신 집에서 남편이 아닌 딸과 살 뿐, 모녀 사이엔 역시 이해하기 힘든 벽이 세워져 있다.


기시감 넘치는 작품 5개의 '짬뽕' 길복순…그래도 이런 재미 못 참지
③ 악녀(2017)=북에서 아버지를 잃고 어린 시절부터 킬러로 길러진 숙희(김옥분)라는 여자 킬러의 설정은 길복순과 거의 흡사하다. 지금의 길복순은 여러 여성 킬러 작품들의 시행착오 끝에 빛을 본 완성품이지만, 그 시초는 '악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숙희는 자신을 킬러로 가르치고 인생의 길잡이가 돼 준 신하균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교차시킨다. 차이가 있다면 숙희가 생존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진지녀라면, 복순은 생활을 위해 암살을 학구적이고 미학적으로 다루는 재미녀다.

기시감 넘치는 작품 5개의 '짬뽕' 길복순…그래도 이런 재미 못 참지
④ 회사원(2012년)=길복순의 주요 테마가 가장 많은 빚을 진 작품이라고 여겨질 정도다. 살인청부회사 내 부서 직함을 판 명함을 들고 다니고, 살인 실적에 따라 승진하는 아이디어가 그렇다. 길복순에선 무허가 암살자 때문에 잃게 된 권위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암살 면허'를 발행하는 대기업 수준의 업체를 두고 A, B, C급으로 단계별 실력자를 구분한다.

길복순은 암살 대기업 MK소속의 A급이지만, 한때 실력자였으나 해고되거나 소위 '찍혀서' 눈 밖에 난 B급, 무허가 살인으로 근근이 먹고사는 중소기업 소속 암살자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대기업 입사'를 노리고 있다. '회사원'의 실력자 소지섭을 경계하는 기획이사 곽도원은, '길복순'에서 A급 복순을 시기하는 이사 이솜으로 각각 설정된다. 실제 회사원에서 승진과 입사를 미끼로 입사 대기자들에게 소지섭을 공격하게 하는 모양새 역시 길복순에서도 고스란히 펼쳐진다.

회사원에서 소지섭 자신과 닮은 실력자 아르바이트생 김동준은 길복순에서 실력자 인턴 이연으로 연상되기도 한다. 소지섭이 10년간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한 치의 실수 없이 모든 일을 완벽하게 수행해 냈지만, 딱 한순간 회사의 뜻을 거스르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도 길복순에서 거울처럼 투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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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킬링 소프틀리(2013)=전도연(길복순)이 선배 설경구와 결전을 벌이는 마지막 장면은 살해 과정의 미학적 부분을 살리는 데 중점을 뒀다. 장시간 이어지는 피 튀기는 설전이 아닌, 가장 극적인 약점을 쥐고 간단하게 처리하는 살해 방식을 느리고 잔잔한, 때론 애절하면서 그리움이 묻어있는 배경음악을 통해 슬로우모션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 장면은 '킬링 소프틀리'에서 보여준 섬세하고 미학적인 살해의 눈부신 촬영 기법을 나름 응용한 듯하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과 제작을 맡은 이 영화에서 킬러 브래드 피트는 도박 업주가 정지 신호에서 선 차 운전석 창문을 향해 총알 한 방을 날리는데, 슬로우 모션으로 창문이 눈송이처럼 알알이 부서지는 파편들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살해 당하는 자의 신음소리로 대체된 달콤한 배경음악은 케티 레스터의 재즈곡 '러브 레터스'(love letters)다. 느린 박자와 슬로우 모션 기법이 만나 살해의 잔인성을 버리고 예술성을 택했다고 할까.

길복순에선 차 유리 대신 유리 컵이 눈송이처럼 부서지고 슬로우 모션으로 부드러운 배경음악인 배리 매닐로우의 '디스 가이즈 인 러브 위드 유'(This guy's in love with you, 이 남자가 당신에게 사랑에 빠졌어요)를 살포시 얹는다.

이 순간 우리는 이 장면이 전도연이라는 배우 때문인지, 구성의 미학 때문인지, 부드러운 여운의 선율 때문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의 총합 때문인지 여전히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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