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의 본류가 기시감 작품의 오버랩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의 조합은 식상하면서도 그럴듯하다. 어쩌면 그렇게 섞인 종합선물세트 같은 장면이 감동이나 의미를 삭제한 채 재미 그대로의 재미만을 선사하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기시감 장면들은 어떤 영화에서 만났을까.
함께 사는 집은 화려하고 눈부시고 아름답고 행복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맞는 게 없다. 음식 취향도, 취미도 달라 시간이 흐를수록 부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만 쌓인다. 길복순은 화려하고 눈부신 집에서 남편이 아닌 딸과 살 뿐, 모녀 사이엔 역시 이해하기 힘든 벽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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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는 자신을 킬러로 가르치고 인생의 길잡이가 돼 준 신하균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교차시킨다. 차이가 있다면 숙희가 생존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진지녀라면, 복순은 생활을 위해 암살을 학구적이고 미학적으로 다루는 재미녀다.
길복순은 암살 대기업 MK소속의 A급이지만, 한때 실력자였으나 해고되거나 소위 '찍혀서' 눈 밖에 난 B급, 무허가 살인으로 근근이 먹고사는 중소기업 소속 암살자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대기업 입사'를 노리고 있다. '회사원'의 실력자 소지섭을 경계하는 기획이사 곽도원은, '길복순'에서 A급 복순을 시기하는 이사 이솜으로 각각 설정된다. 실제 회사원에서 승진과 입사를 미끼로 입사 대기자들에게 소지섭을 공격하게 하는 모양새 역시 길복순에서도 고스란히 펼쳐진다.
회사원에서 소지섭 자신과 닮은 실력자 아르바이트생 김동준은 길복순에서 실력자 인턴 이연으로 연상되기도 한다. 소지섭이 10년간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한 치의 실수 없이 모든 일을 완벽하게 수행해 냈지만, 딱 한순간 회사의 뜻을 거스르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도 길복순에서 거울처럼 투영된다.
이 장면은 '킬링 소프틀리'에서 보여준 섬세하고 미학적인 살해의 눈부신 촬영 기법을 나름 응용한 듯하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과 제작을 맡은 이 영화에서 킬러 브래드 피트는 도박 업주가 정지 신호에서 선 차 운전석 창문을 향해 총알 한 방을 날리는데, 슬로우 모션으로 창문이 눈송이처럼 알알이 부서지는 파편들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살해 당하는 자의 신음소리로 대체된 달콤한 배경음악은 케티 레스터의 재즈곡 '러브 레터스'(love letters)다. 느린 박자와 슬로우 모션 기법이 만나 살해의 잔인성을 버리고 예술성을 택했다고 할까.
길복순에선 차 유리 대신 유리 컵이 눈송이처럼 부서지고 슬로우 모션으로 부드러운 배경음악인 배리 매닐로우의 '디스 가이즈 인 러브 위드 유'(This guy's in love with you, 이 남자가 당신에게 사랑에 빠졌어요)를 살포시 얹는다.
이 순간 우리는 이 장면이 전도연이라는 배우 때문인지, 구성의 미학 때문인지, 부드러운 여운의 선율 때문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의 총합 때문인지 여전히 궁금할 뿐이다.